대전협 실태조사 80% "수련규칙 개정 후 근무시간 동일"
입원전담 전문의 고용, 독립적 수련환경평가기구 설립 촉구
전공의들이 주당 80시간을 초과해 근무할 수 없도록 한 수련규칙 표준안이 시행됐지만 10명 중 8명이 이전과 동일하게 혹사근무를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모 병원 인턴 제보로 본지에 기사화된 '가짜 당직표' 또한 성행 중이다.
전체 전공의 절반 가까이(44.5%)가 병원으로부터 수련현황표를 거짓 작성하라는 직접적인 압력을 받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는 대한전공의협의회가 지난 10월 24일부터 11월 13일까지 전국 전공의 1617명을 대상으로 시행한 설문조사 결과다.
대전협은 16일 대한의사협회 프레스센터에서 '내과 전공의 파업사태, 무엇이 문제인가- 전공의 수련환경 개선 및 입원전담전문의 도입 촉구 기자회견'을 열어 "지금 적신호가 켜진 곳은 내과가 아닌 한국 의료시스템 자체"라고 경고했다.
이날 송명제 대전협 회장은 지난 3월 당시 비상대책위원장으로서 전공의 파업을 주도한 상황을 언급하며 약속을 지키지 않는 정부를 강하게 질타했다.
송 회장은 "전공의들이 환자들을 돌보기 위해 일선 현장으로 복귀했을 때 정부는 수련환경 개선을 약속했지만 돌아온 것은 '개선된' 수련환경이 아니라 '개선된 것으로 작성해야 하는' 수련현황표 뿐"이라며 "전공의들은 암행어사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고 밝혔다.
실제 이번 설문에 참여한 전공의 81.4%가 수련규칙 개정 이후에도 근무시간이 동일하며, 8.9%는 오히려 늘었다고 답했다. 복지부 제출용 수련현황표가 실제와 일치한다는 보고는 23.9%에 그쳤다.
일부 전공의는 주 80시간을 초과해 근무할 경우 병원으로부터 '사유서'를 작성하도록 강요받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그 결과 일을 했으면서도 하지 않았다고 병원측에 거짓 보고하는 전공의들이 생기고 있다는 것이다.
폭력에 노출되는 빈도 또한 심각한 수준으로 진단됐다. 올해 4월 대전협 설문결과에 따르면 22%의 전공의가 신체적으로 폭행당한 경험이 있으며, 이 가운데 50.3%가 교수나 상급 전공의에게 당한 것으로 집계됐다.
살인적인 초과근무를 어떻게든 해내도록 강제하는 구조 속에서 전공의가 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 할 경우 폭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나온다.
송 회장은 "이런 비정상적 병원 환경에서 진료를 받아야 한다는 것은 환자들로서도 불행한 상황"이라며 "초과근무에 지친 몸을 쉬는 대신 폭력이 두려워 진료에 다시 매달려야 하는 전공의가 양질의 의료를 생산하리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어 "자기 병원에 암행어사라도 보내 수련환경을 개선해 달라고 호소하는 전공의들의 고통을 외면하는 것은 누구인가"라고 물으면서 입원 전담 전문의 고용과 독립적 수련환경평가기구 설립을 통해 문제를 해결할 것을 촉구했다.
기자회견에는 함현석 대한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학생협회장과 민경재 경기도전공의협의회장이 참석해 지지발언으로 힘을 실었다. 이밖에 전국 58개 병원 전공의 대표들이 동조의사를 밝힌 상태다.
함현석 의대협 회장은 "전공의 파업 이슈가 불거지면서 실습하는 의대생에게까지 업무부담이 내려오고 있다는 제보가 들어오고 있다. 교육이나 수련이라는 명목 하에 이뤄지는 인력 남용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며 "대전협의 행보를 적극 지지한다"고 강조했다.
민경재 경전협 회장은 "원주세브란스병원 내과 전공의들의 파업소식을 듣고 처음 든 생각은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는 것"이라며 "의대에 입학할 때부터 전공의 생활은 줄곧 두려움의 대상이었는데, 겪어보니 몸이 두 개라도 모자르다. 악습의 고리를 끊을 때가 왔다"고 말했다.
대전협은 최근 복지부에 수련환경평가기구 운영방안 등과 관련해 태스크포스팀 구성을 제안한 것으로 전해졌다. 자체 세부 로드맵을 완성하는대로 대한병원협회에도 간담회를 요청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