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계 위원 빼 놓은 채 자보심의회 규정 일방 개정..."절차상 하자"
병협·한의협 국토부에 운영규정 철회 요구..."소송도 불사할 것"
대한병원협회와 대한한의사협회는 8일 "자보심의회는 자동차손해배상보장법에 따라 보험회사등과 의료기관은 서로 협의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고, 운영규정을 비롯해 중요사항을 결정할 때는 의료업계·보험업계·공익 등을 대표하는 위원 1인 이상을 포함해야 함에도 의료계 대표위원 전원이 불참한 가운데 개정을 강행했다"며 "운영규정을 무시한 결정이자 절차적 하자가 있어 무효"라고 주장했다.
자배법은 보험회사등과 의료기관은 서로 협의해 자동차보험진료수가와 관련된 분쟁의 예방 및 신속한 해결을 위한 자보심의회를 구성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자보심의회에서는 ▲자동차보험진료수가에 관한 분쟁의 심사·조정 ▲자동차보험진료수가기준 조정에 대한 건의 ▲조사·연구 등의 업무를 맡고 있다.
자보심의회는 위원장을 포함한 18명의 위원으로 구성하며, 위원은 국토교통부장관이 위촉하되, 6명은 보험회사등의 단체가 추천한 자 중에서, 6명은 의료사업자단체가 추천한 자 중에서, 6명은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요건을 갖춘 자 중에서 각각 위촉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문제는 지난 8월 13일 의료계 대표자가 불참한 가운데 18인 위원 중 보험업계 6명과 공익 4명 등 10명이 참여한 상태에서 자보심의회를 열어 위원장 자격을 변경, 비의사 위원장을 선출할 수 있도록 하고, 위원장을 상근에서 비상근으로 변경하면서 불거졌다.
조한호 병협 보험위원장은 "자보심의회 위원장이 공석인데다 16인 위원의 임기가 5일 밖에 남지 않아 차기 위원회에서 차분히 논의할 것을 제한하고 의료계 대표위원들이 불참했는 데 남은 위원들이 이같이 결정했다"며 "자보심의회 운영규정에는 구성·운영에 관한 중요사항을 결정할 때는 특별정족수(재적위원 2/3이상 참석, 참석위원 2/3 이상 찬성) 요건을 갖추도록 하고 있음에도 일반정족수(재적위원 1/2 출석, 출석위원 1/2 찬성)로 결정한 것은 무효이자 자보심의회 설립 이후 지속해 온 합의정신을 위배한 대표적 사례"라고 비판했다.
조 보험위원장은 "자보심의회 구성·운영은 대통령령으로 정하고 있음에도 권한이 없는 국토교통부가 9월 7일 자배법 관련 규정 개정을 승인한 것은 월권"이라며 "자보심의회 규정 개정 무효와 승인 철회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행정소송도 고려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병원계는 이번 자보심의회 운영 규정 개정으로 자동차 사고를 당한 환자와 이들을 치료해야 하는 의료기관을 보호할 수 있는 안전망이 와해될 것으로 전망했다.
자보심의회에 병원계 대표로 참석하고 있는 홍정용 위원(대한중소병원협회장)은 "자동차 사고 환자들은 사고 이전으로 망가진 몸을 회복할 수 있도록 최선의 진료를 받고 싶어하는 반면에 손해보험사는 회사의 이익을 위해 진료비를 줄이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자보 분쟁이 일어난다"며 "자보심의위는 법원에서는 다루기 어려운 소액 분쟁을 합의하고 중재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고 설명했다.
자배법 시행령에서는 보험회사등과 의료기관은 이의제기 결과가 자동차보험진료수가기준을 부당하게 적용한 것으로 판단되면 자보심의회에 심사를 청구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홍 위원은 "2013년 7월부터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자보 심사를 맡은 이후 손보사들은 자보심의회를 없애고, 심평원으로 일원화하길 바라고 있지만 의료기관이나 환자의 불만에 귀기울여 줄 자보심의회를 없애게 되면 결국 손해는 자동차 사고를 당한 환자와 최선의 진료를 하고도 심사 삭감을 당해야 하는 의료기관에 돌아가게 된다"고 지적했다.
병원계는 자보심의회 규정 개정에 따라 위원장을 의료에 문외한인 비의사로 하게 되면 손해보험사의 입장에 무게를 싣게 돼 중재 역할에 소홀하게 될 것이라는 입장이다.
더욱이 심평원이 자보 심사를 맡은 이후 심사기준이 '최선'에서 '평균'으로 낮아지면서 자동차보험 진료비 규모가 대폭 줄어든 데다 자보 의료기관이 이의제기를 할 수 있는 창구가 유명무실해 지면 자보환자는 어느 곳에서도 보호받지 못하게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실제 심평원 자보 심사 위탁 이전인 2012년 7월∼2013년 6월 9281억원인 자보 진료비는 심사 위탁 이후인 2013년 7월∼2014년 6월 7953억원으로 1328억원이 줄어든 것으로 집계됐다.
병원계는 심평원이 자보 진료비 심사위탁 첫 해 6개월 동안에 수수료로 80억원 가량의 수입을 올린데 이어 지난 한 해에는 100억원 이상의 수입을 올렸을 것으로 관측했다.
"환자가 사고 후유증 유무를 정확히 알기 위해 CT나 MRI를 찍어달라고 요청하고, 이를 손보사 직원이 승락했더라도 심평원이 삭감하면 의료기관이 대부분의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 최근에는 기왕증 기여율까지 따지면서 삭감률을 높이고 있다"고 밝힌 조 보험위원장은 "손보사의 막강한 영향력에 휘둘려 심의회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면 의사가 제대로 진료를 할 수 없고, 자보환자에게 직접적인 피해가 돌아간다"고 지적했다.
자보 진료비 심사평가를 위탁받은 심평원에 접수된 이의제기 건수는 2013년 하반기 의료기관 4만 9696건, 보험회사 9만 2937건에서 2014년 하반기 의료기관 14만 6347건, 보험회사 2만 4692건 등으로 의료기관은 늘어나고, 보험회사는 줄어드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반면 자보심의회에 접수된 보험회사의 심사청구 건수는 2012년 1만 928건에 달했으나 2013년 6482건으로 절반 가량 줄었으며, 2015년 상반기에는 21건으로 거의 이용하지 않고 있다. 반면, 의료기관은 심사청구 자격이 생긴 2014년 570건, 2015년 상반기 593건으로 늘어나고는 있지만 아직까지 저조한 상황이다<그래픽>.
자보심의회보다 심평원으로 발길을 돌리는 경향이 늘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홍 위원은 "의료기관들이 자보심의회에 관심을 갖고 참여해야 손보사의 월권과 심평원의 가혹한 삭감을 견제할 수 있다"며 "자보심의회에 힘을 실어달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