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언휘 원장(대구 수성·박언휘종합내과의원/한국노화방지연구소 이사장)
눈이 내린다.
전국에 눈이 내릴 것이라는 뉴스를 보면서도, 이곳 대구에 눈이 온다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희미한 눈발속의 거리 풍경은,나를 몽유병 환자처럼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 거리로 나서게 한다.
이렇게 소리없이 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이면, 나는 유년시절의 어머니가 그립다.
길저편에서 손짓하며 기다리던 어머니의 그 모습을 행여 찾을수 있을까봐 무작정 거리로 나선다.
거리의 수많은 상점들을 지나 보석상을 지나노라면, 갑자기 걸음이 더뎌지면서 문도 열지않은 상점앞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화려한 쇼윈도 안쪽 어딘가에 진열돼 있을 반지들을 살피기라도 하는 양 눈길이 오래 머문다. 그런 날이면 거리를 오가는 낯선 이들의 표정이나 눈빛까지도 의미 있는 풍경이 된다. 어머니 때문일 것이다. 어머니의 빈 손가락 때문일 것이다.
유년시절을 나는 외딴섬에서 보냈다. 울릉도에는 겨울이면 눈이 어찌 그리도 많이 내리던지……. 펑펑 함박눈이 쏟아지는 길을 걸어 학교까지 가노라면 머리는 물론 어깨와 등에도 눈이 소복이 쌓였고, 마침내 얼굴까지 덮어버려 눈만 동그랗게 남게 됐다. 살아 있는 눈사람. 아이들은 서로의 눈사람을 보면서 깔깔 웃었고, 덕분에 두 볼은 봄까지도 능금처럼 빨갛게 익어있어야 했다. 그렇게 차곡차곡 쌓이던 눈은 겨울방학이 되기도 전에 아이들의 키를 넘었고 지붕까지도 덮었다. 작은 섬이라 바다를 제외하고는 눈을 치워둘 마땅한 땅조차 없었다. 그래서 어른들은 눈 속으로 긴 새끼를 휘돌려서 터널을 만들었고, 아이들은 희미한 빛이 들어오는 그 터널 속을 지나 학교에 갔다.
폭풍우 때문에 육지 중학교로 진학을 못하게 되던 날, 나는 몇날밤을 새워 울었고, 어머니의 가슴은 포효하는 파도소리로 멍이 들어갔다.
바다를 원망하며 고향에서 중학교 생활 3년을 보내야 했다.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치르러 육지로 나가던 날, 어머니는 빨갛게 피던 동백꽃을 꺾어 오셨다.
"언휘야, 넌 틀림없이 이 동백꽃처럼 얼지도 시들지도 않고 예쁘게 꽃을 피우게 될거야."
맏딸을 육지로 유학 보내신 어머니는 매일, 보이는 곳마다 물을 떠놓고 기도하셨다. 그사이 나는 대구에서 고등학교를 거쳐 의과대학에 진학을 했다. 어머니는, 몸이 약하면서도 약을 잘 못 먹는 나를 위해 겨울이면 감기에 특효라며 누렇게 잘 익은 호박으로 만든 호박엿을 보내주셨고, 여름에는 고향의 특산물인 자주감자떡을 손수 만들어 오셨다. 소풍만 갔다 와도 코피를 흘려댔고, 그 코피마져도 무서워 울던 내가, 의과대학을 무사히 졸업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어머니의 기도 덕분이었으리라.
유난히 멋 부리기를 좋아하셨던 어머니의 양쪽 장지손가락에는 항상 예쁜 금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물론 육지에 나오실 때도 손가락에는 어김없이 그 반지들이 반짝였다.
그 무렵,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나와 4명의 동생은 휴학을 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됐다. 어머니가 오셨다.눈 귀한 대구에 하루 종일 눈이 펑펑 내리던 날이었다. 어머니는 기꺼이 양손에서 반지를 빼내 우리 손에 쥐어주셨다. 한 번도 반지를 뺀 적 없던, 생일선물로 아버지가 해주셨다던, 그 반지였다.
그 반지로도 우리들의 학비를 다 충당할 수는 없어, 결국 나는 휴학을 했지만 동생들은 무사히 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무사히 의과대학은 졸업을 했지만, 어머니의 반지만은, 도로 사드리지도 못한 채 유학을 떠났다. 세계 어느 나라, 어느곳에서든 반지 파는 상점을 만나면 어머니의 양손에서 반짝이던 그 반지와 같은 모양이 있을까 하여 찾고 또 찾았다. 없었다.
10여년 전, 봄볕이 따사롭게 문지방을 넘나들던 어느 날, 어머니의 반지와 같은 모양은 아니었지만 작은 반지를 하나 선물해드렸다. 며칠 뒤 경주 큰아버지 댁에 잔치가 있었다. 어머니는 곱게 차려입으신 모습으로 많은 사람들 앞에서 왼팔을 번쩍 치켜드셨다. 그리고는 손가락을 쫙 펴고 흔드셨다.
"이거 우리 딸이 해준 반지라네."
그 반지가 어찌 자식을 위해 기꺼이 내어주셨던 그 눈 오던 날의 반지와 같을 수가 있겠는가. 어머니의 오른쪽 장지손가락은 여전히 비어 있었고, 나의 반지 찾기는 계속됐다.
수년전, 대구에도 유난히 눈이 많이 내렸다. 눈을 맞고 서서 반지 찾는 마음이 한없이 허허로웠다.
7년전 여름, 똑같은 반지를 찾아내기도 전에 어머니가 먼저 우리 곁을 떠나셨다.
"너만 믿는다. 우리 딸이 있으니 난 아파도 걱정 안 해."
내 손을 잡고 하시던 어머니의 말씀이 아직 귓전에 그대로 있다. 떠나시기 일주일 전 몹시 무덥던 어느 여름 날, 바다냄새가 그립다며 고향에 가셨다. 다음날 돌아오실 때 입을 옷을 차곡차곡 챙겨 머리맡에 두고 잠드신 어머니는 영영 그 옷을 입지 못했다.
"엄마, 사랑해!!"라고 고백하던 내게 "나도 널 하늘만큼 땅 만큼 사랑해."
마지막 말을 남기고 다시 못 올 곳으로 가셨지만, 나는 아직도 어머니를 보내지 못한 모양이다.
"많이 벌어야 많이 베풀수 있단다" 행여 내가 지칠까봐, 세상의 외롭고, 아프고, 힘든 이들의 어머니가 돼야 한다며 격려와 응원을 아끼지 않으시던 나의 어머니!
고향 눈속의 그 빨간 동백꽃이 참을수 없는 그리움으로 하얗게 눈송이로 흩날리는 오늘.
너무 늦어버린 반지 찾기지만 이 또한 영영 끝날 것 같지 않다. 오늘처럼 쇼윈도 안, 잘 보이지도 않는 진열장에 자꾸만 눈이 걸릴 것이다.
"언휘야, 시들지 말고, 눈 속에서도 피어나는 동백꽃 붉은 열정과 사랑으로 세상의 어머니가 되거라." 하시던 어머니의 바람이 문득 내안에서 작은 꽃망울을 맺는다.
어머니,
오늘은
당신의 사랑이 하얀 눈꽃으로 내리는 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