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도 명예도 권력도 그를 막을 수 없었다

돈도 명예도 권력도 그를 막을 수 없었다

  • 이영재 기자 garden@kma.org
  • 승인 2018.10.05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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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과 함께 농촌과 함께 외길
쌍천 이영춘 박사의 삶 < 3 >

일제강점기 소작 농민의 삶은 처참했다. 높은 소작료에 짓눌려 삶은 피폐했고 보건위생 상식이 부족했던 그들은 갖가지 질병에 신음하다 숨을 거두는 경우가 많았다.

쌍천 선생은 보건위생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 계몽과 농촌의 환경 개선을 서둘렀다. 단순히 질병에 대한 접근보다는 예방의학을 근간으로 한 보건의료사업을 염두에 두고 일을 진행했다.

그는 1938년 개정보통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신체검사를 실시하고 위생교육을 시작했다. 500여명이나 되는 전교생의 체온 측정과 결핵반응검사를 실시했다. 검사결과 체온이 37.2℃ 이상인 아이들이 전교생 가운데 3분의 1을 넘었고, 결핵 양성반응은 24.7%로 나타났다. 미열이 있는 아이들은 재검을 통해 결핵, 코와 귀의 화농성 질환, 치조농양과 피부병 등을 진단하고 치료했다. 

또 결핵에 걸린 아이 주변에 앉은 아이가 결핵에 감염되는 비율이 아주 높다는 점을 밝혀내 중국 만선의학회와 일본 학생위생총회에서 발표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무의촌 진료반 기념사진.
무의촌 진료반 기념사진.

쌍천 선생은 춘궁기 아이들이 도시락을 싸오지 못하는 경우가 많으면서 영양상태가 부실해지자 농장주와의 단판에 나섰다.

"학생들 대부분이 심한 탈진 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전교생 70% 이상이 도시락을 싸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흉년 때문입니다. 학생들의 결식은 질병과 연결됩니다. 굶주려 체력이 저하되면 발육도 되지 않고 저항력이 떨어져 병에 걸릴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의 간절한 호소는 농장주의 마음을 움직여 결식학생 340여명에 대한 학교 급식이 시작됐다.

이듬해에는 개정보통학교에 위생실을 설치하고 국내 처음으로 양호교사를 배치했다. 이어 개정·지경·화호 지역에 지금의 보건지소 역할을 하는 진료소를 설립했다.

1940년 5월부터는 56명의 학생에게 결핵 예방을 위해 결핵면역원 TAC를 1회씩 20주간 접종했다. 1941년에는 개정보통학교에 이어 대야보통학교·화호보통학교에도 위생실을 개설하고 두 곳에도 양호교사가 부임할 수 있도록 했다. 

무엇보다 교육의 중요성을 파악한 그는 교사들을 대상으로 학교위생강습회를 정례화하고 보건위생의 필요성을 알리는 <학교위생계획과 서의 감상> <학교신체검사기구·위생재료 약품 및 구급처치법> 등의 책자를 발간해 보급에 나섰다. 학교위생강습회에 대해 보건위생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면서 전라북도 내 교사들을 대상으로 한 강습회가 광복 때까지 계속됐다.

쌍천 선생의 이런 노력으로 개정면민의 위생과 건강상태는 다른 지역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개선됐다. 

아이러니하지만 1942년 일제가 조선인 강제징집을 위해 실시한 신체검사에서 옥구군 10개면 가운데 개정지역 청년은 갑종판정이 80%를 상회한 반면 다른 지역은 30∼40%에 그쳤다. 일본 내에서도 이런 경우는 없었다.

1938년부터 시작된 쌍천 선생의 노력으로 농민들의 건강지표는 좋아졌지만 만족할 수 없었다. 농민은 개정지역에만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더 큰 꿈을 구체화시키기 시작했다.

그는 오래전부터 염두에 둔 '조선농촌위생연구원' 설립을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조선농촌위생연구원은 단순히 질환 치료를 위한 의료시설이 아니라, 치료와 예방사업을 병행하고 별도로 결핵요양원을 운영하는 구상이었다.

쌍천 선생은 농장주에게 조선농촌위생연구원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읍소했지만 구마모토는 농장의 경영 상황을 에두르며 거절한다.

구마모토 옹.
구마모토 옹.

일본 제국주의의 종말은 다가오고 있었다. 1903년 농장의 문을 연지 40년이 넘어서면서 일제는 급박한 전황에 내몰리게 됐다. 패망을 눈앞에 둔 구마모토는 쌍천 선생에게 뜻밖의 제안을 했다. 

패망하면 전재산을 몰수당할 것을 염두에 둔 구마모토는 병원건립을 조건으로 15만원을 내놓겠다는 것이었다. 당시 15만원은 현재 가치로 수십억원이 넘는 큰 돈이었다. 

그러나 쌍천 선생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농촌의 보건위생 향상과 조선농촌위생연구원 설립에 열과 성을 다하고 있던 선생에게 개인병원 건립은 그의 길이 아니었다.

광복 이후 구마모토의 국내 재산은 모두 몰수당한다. 자혜진료소 역시 운영자금이 없어 문을 닫을 처지에 놓이게 됐다.

모든 게 물거품처럼 흩어질 위기에 처한 그 때 거부하기 어려운 두 가지 제안이 들어온다. 

세브란스의전 스승으로 그의 박사학위 논문 지도교수인 윤일선 박사가 병리학교실로 복귀를 요청해 온 것이다. 또 한가지는 외과학계 태두인 이용설 박사가 광복후 미군정청 보건후생부장을 맡으면서 차장직을 권유한 것이다. 

현재로 보면 연세대학교 교수와 보건복지부 차관 자리였다. 그러나 쌍촌 선생의 유일한 관심은 함께 지내온 농민뿐이었다. 

수십억원의 돈도, 교수와 의학자로서의 명예도, 관직에 올라 누릴 수 있는 권력도 쌍천 선생의 마음을 움직이지는 못했다. 오히려 그가 꿈꿔온 조선농촌위생연구소 설립에 더욱 매진한다.

1946년 러치 미군정관을 만나 10년동안의 자혜진료소 활동을 소개하고 농촌위생연구소 설립을 위해 구마모토 소유의 논 1500정보 반환을 요청한다.

러치 군정관의 마음을 움직인 쌍천 선생은 일본인 몰수 농지 관리기관인 신한공사의 지원으로 자혜진료소의 문을 다시 연다. 그리고 1947년에는 자혜진료소를 확대 개편해 정식으로 개정중앙병원을 개원한다. 개정중앙병원은 내과·소아과 등 6개과에 8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입원실을 갖추고 출범했다.

드디어 쌍천 선생의 오랜 꿈이 눈앞에 다가왔다. 1948년 3월 신한공사가 중앙행정처로 개편되면서 농촌위생연구소 설립을 적극 지원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그해 11월 7일 쌍천 선생이 그토록 갈망하던 농촌위생연구소는 첫발을 뗀다.

농촌위생연구소가 어떤 의미였는지는 개소식에 참석한 인사들의 면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개소식에는 이범석 국무총리, 신익희 국회의장, 조봉암 농림부 장관, 김구 선생 등과 2000여명이 참석해 농촌위생연구소의 시작을 세상에 알렸다. 농촌위생연구소 설립 목적에는 쌍촌 선생의 철학이 그대로 담겼다. 

"민족의 영원한 발전은 그 원천이 건정한 농촌에 있음을 우리는 확념한다. 우리의 연구 대상은 농촌사회와 그 농민이다. 우리의 농촌 현실은 농촌위생을 추진시킴에 있어 시급한 위료시설의 보급을 요구한다."

개정중앙병원과 농촌위생연구소를 통해 농촌의료지원활동을 펼치려던 쌍천 선생은 간호인력 부족으로 난관에 부딪힌다. 의사인력은 확보할 수 있었지만 간호인력은 크게 부족했다. 다양한 인맥을 동원하고 갖가지 묘안을 내봤지만 백약이 무효였다. 

농촌위생연구소 설립을 통해 쌍천 선생의 농촌의료사업은 이미 중앙행정부처도 인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궁하면 통하는 것일까. 그의 활동을 눈여겨 본 관계 공무원의 도움으로 농림부 토지 정리 작업 중 확인된 잔여금 2000만원을 농촌의료사업비로 지원받는다. 

간호학교 체육대회.
간호학교 체육대회.
보건교육을 위한 어머니 교실.
보건교육을 위한 어머니 교실.

그는 곧바로 간호원 양성학교와 개정중앙병원 수술실 신축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들어간다. 간호원양성학교를 위해 강의실과 기숙사를 갖춘 2층 목조건물을 마련한다. 1951년 7월 문교부가 개정고등위생연구소로 인가해 간호조산과 31명에게 첫 강의를 시작했다. 이 학교가 지금의 군산간호대학이다. 

쌍천 선생의 손길은 어디에서나 첫 흔적으로 남는다. 

한국전쟁 중 부산 피난길에서 조병옥 내무장관으로부터 경찰병원 설립을 요청받는다. 그는 부산 토성보통학교 교정에 가마니를 깔고 진료를 시작했으며 국립경찰병원의 효시가 됐다. 누구보다 배움에 대한 열정이 강했던 삶의 이력은 1955년 화호여자중학교 설립으로 이어진다.

의사로, 농촌의료활동가로, 교육자로 다양한 삶의 역정을 보여준 쌍천 선생은 일흔 나이에 또 하나의 큰 족적을 남긴다.

일제강점기부터 기회가 될 때마다 선진국의 의료 제도와 기술을 받아들여 온 쌍천 선생은 광복 이후에도 미국·일본·태국·대만 등에서 열리는 각종 의학세미나와 국제 학술대회에 참석하면서 교류 폭을 넓혔다. 1960년대 말부터 의료보험제도를 도입한 일본을 눈여겨 보던 선생은 1973년 개정병원을 중심으로 의료보험을 도입한다.  

국내 첫 의료보험인 '옥구청십자의료보험조합'의 시작이다. 의료보험이란 말 자체가 생소했던 때 쌍천 선생은 가입비 300원, 매달 회비 200원, 의료수가는 입원시 20%, 외래진료 50% 본인부담으로 의료보험의 기본 틀을 정했다.

옥구청십자의료보험조합이 시작된 후 정부는 1974년부터 옥구군을 포함한 6개 지역에 의료보험을 정부 시범사업으로 시행했다. 

1989년 전국민의료보험시대를 예비한 쌍천 선생의 혜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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