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공급자 '패싱' 일방통행 정책 '유감'

의료공급자 '패싱' 일방통행 정책 '유감'

  • 이필수 대한의사협회 부회장(전라남도의사회장) good@doctorsnews.co.kr
  • 승인 2020.01.03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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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계 참여·의견 배제...손해율 증가 책임 전가
기승전(起承轉) 결론 '청구간소화법안' 본말 전도

이필수 의협 부회장(전라남도의사회장)
이필수 의협 부회장(전라남도의사회장)

김강립 보건복지부 차관과 손병두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은 2019년 12월 11일 '공·사 보험 정책협의체'를 개최하고, '실손의료보험의 상품구조 개편과 건강보험 비급여에 대한 관리 강화 추진 계획'(실손보험 관리 계획)을 발표했다.

정부의 '실손보험 관리 계획'을 보면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에 따른 보험금 지급감소분 추산 결과는 자료의 대표성에 한계가 있다는 지적에 따라 2020년도 실손보험료에 반영하지 않기로 했다. 의료기관 이용률에 따라 실손보험료 할인·할증제 도입을 검토하는 내용도 담고 있다.

협의체에서 보건복지부 차관은 "의학적 필요도가 있는 비급여 항목은 가능한 급여화하고, 필수적 의료에 대해 비급여 발생을 억제하겠다"고 밝혔다. 아울러 비급여 진료비용 공개 대상 항목을 올해 340개에서 2020년 500개로 늘리고, 공개 대상을 의원급으로 확대키로 했다. 건강보험 비급여 관리 강화 방침과 함께 국회에 계류 중인 공·사 보험 연계법을 조속히 제정해야 한다는 점도 언급했다.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은 "실손보험으로 인한 과잉진료 및 불필요한 의료이용 방지를 위해 실손보험 구조 개편을 추진하고, 소비자의 실손보험 청구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청구간소화 법안 통과에 최선을 다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우리나라에 의료보험제도가 처음 도입된 것은 1960년대 박정희 정권 때다. 당시 1인당 국민소득이 120달러(당시 세계 평균 481달러)에 불과했지만 북한과의 체제 경쟁을 하면서 1963년 '의료보험법'을 제정하고, 시범사업을 시작했다. 시범사업 이후 1977년 1500명 이상 사업장을 대상으로 직장의료보험제도를 도입했으며, 1979년 1월 공무원과 사립학교 교직원, 1988년 1월 농어촌 지역의료보험, 1988년 7월 5인 이상 근로자의 사업장 직장의료보험을 확대했다. 1989년 7월 도시지역 자영업자까지 확대하면서 전 국민 의료보험제도를 완성했다.

정부는 의료보험제도를 도입할 당시 보건의료 분야에 쓸 재정이 부족하자  공공 보건의료 기능을 민간 의료기관에 거의 떠 맡겼으며, 그 반대급부로 폭넓게 비급여 진료를 허용하는 '저수가·저보험료·저급여'의 3저 패러다임의 기조하에 건강보험을 운영했다. 그 결과 국민은 의료비의 상당 부분을 자신이 부담했으며, 의료기관들은 건강보험 진료로 인한 적자를 비급여 진료비에서 벌충했다.

2016년 A대학 연구보고서에서 국민건강보험공단이 직영하는 일산병원 자료를 분석한 결과, 현 의료수가의 원가보전율이 78%에 불과한 것으로 분석됐다.

비급여 진료는 한국 의료의 아킬레스건이자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비급여 진료를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국민의 의료비 부담이라는 측면에서 비난의 소지도 있지만 열악한 보건의료 재정을 떠받친 역사적 유산이자 한국 의료가 성장하는 과정에 상당한 동기를 부여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국민의 소득 증대와 더불어 늘어난 의료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비급여 진료를 급여화 하는 정부의 정책 방향은 원론적으로는 맞다.

정부는 비급여를 급여화 하는 과정에서 의료현장(시장)의 형편은 고려하지 않은 채 단가를 후려쳐 급여화를 강행했으며, 의료 공급자를 박리다매식 아수라장으로 내몰았다.

실손보험 문제만 해도 그렇다. 실손보험은 건강보험이 보장하지 못하는 중증질환이나 고비용 검사로 인한 본인 부담금을 지급해 주는 사보험 상품이다. 

그동안 의료 소비자들은 비급여 진료비 부담 문제를 민간보험을 통해 해결해 왔다. 비급여 진료비는 의료이용을 적절하게 억제하는 시장기능을 수행하는 측면도 있다. 

정부는 건보 보장성 강화 정책을 추진하면서 실손보험사가 지급해야 할 금액이 줄어들 것으로 예상하고 실손보험료를 인하하기 위한 공사 보험 연계법안을 제정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예상을 뛰어넘어 의료 이용량이 급증하고, 실손보험사의 손해가 발생하자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급기야 '공·사 보험 정책협의체'를 열어 건강보험 비급여 관리 강화 계획을 추진하겠다며 보험회사의 주장에 동조하고, 발맞추는 것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일이다.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정책으로 인해 본인 부담금이 줄어들면서 의료 이용량이 급증하고, 실손보험사의 지급 부담이 늘어나고 있다. 실손보험사의 지급 부담이 늘어나고 손해율이 증가한 근본적인 원인과 책임은 바로 정부에 있는 것이다.

하지만 보험업계는 실손보험사의 지급부담이 늘어난 것을 의료계의 비급여 진료비 때문이라고 주장하면서 실손보험료 인상과 정부의 비급여 관리를 강화하라고 주장하고 있다.

원인과 책임은 정부에 있음에도 의료계의 비급여 진료비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게다가 의료공급자는 정책협의체에 참여하거나 발언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있다.

금융위원회는 여론을 호도해 의료계를 비급여 진료나 탐하는 부도덕한 집단으로 매도하면서 기승전(起承轉) 결론을 '청구 간소화법'으로 몰아가고 있다.

의료계는 실손보험 청구 대행을 담은 보험업법 개정안을 국민을 속이고 보험사의 배만 불리는 악법이라며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의협신문
의료계는 실손보험 청구 대행을 담은 보험업법 개정안을 국민을 속이고 보험사의 배만 불리는 악법이라며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의협신문

정부는 지난 2000년 의약분업제도를 강행하면서 의사들을 약가 마진이나 챙기는 부도덕한 존재로 매도했다. 의료계는 의약분업을 강행하면 연간 3조 원 이상 재정 부담이 발생할 것이라고 경고했으나 정부는 오히려 연간 1조 원의 재정 절감 효과가 있다고 국민에게 거짓으로 홍보하며 의약분업을 강행했다. '先시행, 後보완' 약속도 지키지 않고 있다.

정부는 이번에도 재정이 급증하고, 의료전달체계가 붕괴될 것이라는 의료계의 우려를 묵살한 채 비급여의 급여화 정책을 강행하고 있다.

정부의 불안한 행보는 자칫 우리나라 의료를 세계적 수준으로 이끈 의료인들의 자부심과 발전 동기를 꺽고 있으며, 의료산업마저 흔들고 있다.

세계은행이 발표한 2016년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은 27,600달러(세계 평균 10,299달러)다. 우리나라가 의료보험제도를 처음 도입한 1963년 세계 평균에 비해 4분지 1일 채 안된 120달러에 불과한 나라에서 이제 세계평균의 2.5배가 넘는 OECD 10대 국가의 반열에 올랐다.

건강보험과 의료제도도 국격에 걸맞게 바꿔야 한다. 언제까지 전공의들의 열정페이와 민간의료기관을 마른 수건짜기식으로 수탈하면서 보건의료체계를 꾸려가려 하는가?

정부는 의료기관들이 비급여에 의존하지 않고 운영될 수 있도록 '저수가·저보험료·저급여'의 패러다임을 '적정수가·적정보험료·적정급여'로 바꾸고, 규제 일변도의 정책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건강보험 개선책을 마련해야 한다. 

실손보험사의 과도한 보험료 지급 원인이 되고 있는 급격한 보장성 강화 정책 방향을 즉각 전환해 필수 의료를 중심으로 점진적이고, 안정적인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

금융위원회는 공사보험 연계만 나오면 의료계를 부도덕한 집단으로 간주하고, 해법이 청구간소화법인양 호도하는 행위를 즉각 중단해야 한다. 실손보험사가 상품을 잘못 설계했는지, 오류는 없는지 내부부터 점검해야 한다. 

정부는 보건의료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의료계의 의견을 무시하고, 배제해선 안된다. 공사보험 정책협의체에 의료공급자를 참여토록 함으로써 합리적인 의견에 귀 기울여야 한다.

의료계를 패싱하는 행태를 계속할 경우 국민 건강권을 보호하고, 의료 선택권을 수호하기 위해 강력한 저항에 나설 수밖에 없음을 정부는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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