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라클레스를 기다리며
1.
하루 종일 죽고 싶은 생각만 들어요
오늘 영정사진 찍으러 갈 거예요
의사 선생님을 다음 주에도 면담할 수 있을까요
다음에 들어온 고딩.
첫 마디가 그도 죽고 싶단다
흰 블라우스를 걷고
칼자국이 난 가냘픈 흰 손목을 보여준다
도시 곳곳에 넘실대는
이 검은 파도는 무엇인가
2.
불같이 타오르는
뜨거움 대신
단숨에 내달리는
철썩임 대신
뒤란 흙벽에 마른 무청같이
바스락거리며 걸려있는
젊음들
세상이 밋밋하단다
지루해 못 견디겠단다
술과 섹스와
그리고 칼 자욱
광란과 상처에 기대어
겨우 서있는 하루
3.
회색 지붕 위에 태양은
점점 식어가고
창백하기만 한 에로스
그믐밤 문둥이처럼
하나, 꿀꺽
오늘도 또 하나,
꿀꺽
도시 곳곳에 서성대는
타나토스와 시프노스의 그림자
4.
오늘도 손목을 또 그었니?
그으면 좀 시원해요!
참을 수가 없었어요!
아팠겠다
손목을 어루만진다
▶한국의사시인회장/시집 <어떤 우울감의 정체> <세상은 내게 꼭 한 모금씩 모자란다> <역> <여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산문집<어른들의 사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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