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사 강화 대신 '청구 대행' 전면에...전략 바꾼 보험업계
핵심은 '비급여 심사체계 구축'...사전 진료계획 심사 구상도
국회에 제출된 보험업법 개정안들은, 실손보험 청구를 의료기관들이 대행하게 하면 보험금 청구와 관련한 환자들의 편익이 크게 증진될 것이라고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다.
실손보험 청구 방식을 변경하는 것은, 모두 '국민'을 위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과연 그럴까?
각 개정안들이 제안한 실손보험 청구대행 절차는 이렇다.
환자가 요청한 경우 의료기관이 해당 환자의 진료비 내역 등을 전자적 방식을 통해 중계기관(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전송할 수 있게 하고, 의료기관에서 자료를 넘겨받은 중계기관이 다시 이를 다시 각 보험사에 주도록 한다는 게 핵심 모델이다.
현재는 '환자→보험사'로 직접 서류를 보내는 형태라면, 앞으로는 '환자(동의)→의료기관→중계기관(심평원)→보험사'로 자료 제공 체계가 달라진다.
국회는 이 경우 환자의 보험금 청구 편의가 크게 제고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환자가 병의원에서 일일이 보험금 청구에 필요한 서류를 떼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되고, 보험금 청구 불편이 줄어드는 만큼 환자들이 '안 찾아가는 보험료' 이른바 낙전도 크게 줄 것이라는 기대다.
환자 편의만을 보자면 일견 타당성 있는 발상으로 보이기도 한다. 10년 넘게 이어지고 있는 보험사들과 금융당국의 '밑작업'을 없던 일로 할 수 있다면 말이다.
보험사가 원하는 건, 중계기관 아닌 비급여 데이터와 심사기구
결론부터 말하자면 실손보험 청구대행은 보험사들이 꿈꾸고 있는 실손보험 개혁의 끝이 아니라, 시작에 가깝다.
보험사들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환자의 편의를 위한 청구 중계기구가 아니며, 비급여를 포함한 가입자들의 체계화 된 진료정보와 이를 전문적으로 심사할 공신력 있는 기구다.
비급여를 포함한 체계화된 진료정보는 보험사들의 전략적인 상품개발을 용이하게 하고, 전문심사기구는 보험료 심사강화 즉 보험금 지급 손실 절감으로 이어진다.
보험사들을 뒷배로 한 금융당국은 지난 2012년과 2016년 각각 유사한 내용을 골자로 하는 실손보험 개선대책을 내놓았다, 의료계와 시민사회의 반대에 부딪혀 고배를 마신 바 있다.
2012년에 나온 '실손보험 종합개선 대책'은 실손보험 심사강화를 전면으로 내세웠다. 개별 보험사가 비급여 의료비를 확인하는데 한계가 있으니, 전문심사 기구인 심평원에 실손보험 심사업무를 위탁하자는게 대책의 핵심이다.
보험개발원을 심손보험 심사위택 대행기관인 보험정보원으로 확대개편하고, 심평원과 확대개편 된 보험정보원이 공사보험의 진료정보와 심사정보를 공유하도록 하자는 계획도 내놨다.
실손보험의 손해율이 매년 지속적으로 상승하고, 이로 인해 보험료 인상이 계속되고 있는 만큼 불필요한 보험금 누수를 막아, 궁극적으로 국민 보험료 부담을 낮춰야 한다는 논리였다.
의료계와 시민사회는 반발했다.
금융위 계획대로 실손보험 심사를 심평원에 위탁할 경우 실손보험에 대한 심사가 강화돼 관련 진료가 위축될 우려가 크며, 여기에 더해 공사보험 간 정보공유가 정례화 될 경우 공보험의 진료정보가 민간으로 유출, 악용될 수 있다는 지적이었다.
정부가 민간보험사의 이익보전을 위해 국민의 건강정보를 보호할 책임을 방기하고, 건강보험과 '보충형' 민간보험의 역할 구분을 해치려 한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높았다.
심사강화 대신 청구대행 전면에...전략 바꾼 보험업계
좌절을 겪은 금융당국은 2016년 '실손보험 안정화 방안'이라는 이름으로 실손보험 개선작업에 다시 시동을 걸었다. 실손보험 청구대행이 개선계획의 전면에 놓인 것은 이 때부터다.
금융위는 심사강화와 보험금 누수방지를 강조하는 대신 병의원 청구대행과 그에 따른 국민 편익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병의원이 청구를 대신해주면 국민이 편해진다는 논리다.
의료계는 의구심을 거두지 못했다. 청구대행은 금융당국이 지속적으로 주장해왔던 심사강화를 위한 수순에 불과하다는 지적이다.
의료계는 병의원을 통한 청구대행 서비스가 어느 정도 활성화돼 의료기관이 실손의료보험 진료내역을 온라인으로 송수신하는 환경이 조성되면, 정부가 이에 더해 실손보험 심사업무를 심평원으로 위탁하는 방안을 추진할 것이라고 봤다.
청구 대행의 중간 기지를 건강보험심사평가원으로 잡은 것도, 이런 흐름과 맞닿아 있다는 합리적 의심과 함께다.
당시 대한의사협회와 대한병원협회·대한치과의사협회·대한한의사협회·대한약사회 등 의약단체들은 "소액보험료 청구를 간편하게 한다는 것은 미끼일 뿐 결국 국민들의 의료서비스 이용을 제한하고, 의료비 지출을 절감해 민간보험사의 보험료 지급을 줄이는 것이 목적"이라고 한 목소리로 반대했다.
"청구대행을 전면에 두었지만 실손보험 심사를 심평원으로 이관시키는 수순을 밟을 것"이라고 경계한 이들은 "실손보험을 심평원에서 심사해 건강보험의 기준으로 적정성을 평가하는 것은 국민의 건강권·재산권을 침해하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청구대행 발판 삼은 보험업계 청사진은? 비급여 심사체계 구축
그리고 다시 4년이 흐른 지금, 금융당국을 중심으로 다시 한번 실손보험 제도개선 움직임이 본격화되고 있다.
보험연구원은 지난달 말 관련 공청회를 열고 "실손의료보험 제도의 안전성·지속성을 위해 할인·할증 보험료 차등제, 급여·비급여 보장구조 분리, 자기 부담금 향상, 재가입주기 단축 등 상품구조 개편을 진행해야 한다"고 밝혔다.
장기적으로 "비급여 진료수가·진료량 가이드라인 수립과 비급여 전문심사기관의 구축 등이 필요하다"는 주장과 함께다.
보험연구원은 지난해 10월 내놓은 실손의료보험 현황과 개선방안 보고서에서 이에 대한 내용을 보다 자세히 다루고 있다. 개선안이 가르키는 종착점은 '비급여 심사체계 구축'이다.
보고서는 "비급여 심사체계 구축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당면과제로 실손 보험금 관리차원을 넘어 우리나라 보건의료체계의 정비과정에서 합리적인 시스템 구축을 검토해야 한다"고 밝히고, 심평원에 실손보험 심사업무를 위탁하는 방안을 주창했다.
"국민의료비 관리가 국가적 과제임을 고려할 때 실손 보험금 심사는 의료서비스에 대한 전문성과 공신력을 갖춘 심평원의 심사 당위성이 충분하다"고 밝힌 연구원은 "심평원이 예비급여 편제를 담당하고 있으니, 실손보험금 비급여 심사시 일관된 기준 적용을 통해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정책의 효과 제고도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비급여 진료 관리를 목적으로 하는 진료계획 사전심사 계획도 밝혔다.
보고서는 "비급여 진료에 대한 의료적 전문판단을 존중하고 수가책정 재량을 인정하면서도, 보험금 지급과 관련한 분쟁 발생 가능성 감소 와 국민 의료비의 낭비적 요소를 예방할 수 있도록 이해관계자의 합의하에 사전 기준을 정립할 필요가 있다"며 비급여 진료 가이드라인 수립을 요구했다.
"의료기관과 보험회사간 협의 하에 비급여 진료에 대한 기본 계획을 수립하고 환자의 상태 등을 고려해 추가적인 비급여 진료가 필요한 경우 의료기관이 진료 전 보험회사에 추가 진료 계획을 제출하도록 하는 등 제도적 장치 마련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대한의사협회를 중심으로 한 의료계는 국회의 보험업법 개정 움직임에 반발, 결사항전을 예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