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의사협회 주최·한국의사수필가협회 12회째 주관...금상(대한개원의협의회장상)
후원 서울시의사회·대한개원의협의회·대한의학회·한국여자의사회·박언휘슈바이쳐나눔재단
묘하게 알아보기 어려웠던 기억이 난다. 생전보다 특별히 부으시거나 살이 빠지신 것도 아닌데도. 가만히 들여다보자 그제야 익숙한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왔다. 돌아가시기 전 담도가 막힌 탓에 온통 누렇게 변해 있었기는 해도, 확실히 명절 때마다 뵈었던 그 얼굴이 맞았다.
기묘했다. 그냥 주무시고 계신 것처럼 보이다가도, 어느 순간 보면 또 아예 사람인 적 없었던 밀랍인형처럼 보였다. 왜 옛사람들이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빠져나간다고 생각했는지 짐작할 것도 같았다. 생명의 마지막 흔적마저 자취를 감춘 얼굴은 마른 강바닥 같았다. 강이었고, 강의 모양을 하고 있지만, 넘실거리는 뭔가가 사라져 버렸기에 강이라고 하기에는 어색하고 이질적인.
천성이 감성적인 엄마는 할머니 옆으로 다가가 떨리는 목소리로 "어머니, 먼저 가 계셔. 거기서 편히 계시면 나중에 갈게. 나중에 만나"라는 말을 남기고 오열하기 시작했다. 적당히 무뚝뚝한 아빠는 "고생했어" 한마디만 하고 소리 없이 울었다. 나는 조용히 할머니 손만 몇 번 잡았다 놓았다. 차고 버석버석했다.
솔직히 나는 할머니와 그렇게 친하지 않았다. 집에서 막내인 나는 '아들러의 출생순위에 따른 성격이론'에 걸맞게 어렸을 때부터 애교가 많았다. 하지만 할머니는 내가 아무리 아양을 부리고 살갑게 굴어도 슥 쳐다보기만 하실 뿐 별 반응이 없으셨다. '우리 강아지' '귀여운 내 새끼' 같은 반응은 고사하고, 먼저 안아주시는 일도 드물었다. 할머니를 뵈러 가도 반가운 기색 없이 무심한 충청도 사투리로 "왔여?" 하실 뿐이어서, 참 대하기 어려운 분이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나이가 들면서는 할머니께 다가가지 않았다. 명절에 뵈러 가면 예의 있게 인사는 해도 단둘이 있는 상황은 피했다. 방 안에 단둘이 있으면 몹시 어색해서 공간이 느리게 뒤틀리는 듯했다. 엄마는 할머니가 표현을 안 하실 뿐 마음으로는 나를 아끼신다고 말하곤 했지만, 그걸 실감한 적은 없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나는 아무 서먹함도 불편함도 없이 할머니 얼굴을 오래 바라볼 수 있었다. 눈물은 나지 않았다. 슬픈 감정도 들지 않았다. 다만 어떤… 무거운 뭔가가 아주 깊고 낮은 해저 바닥으로 가라앉는 듯한 감정이 들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날은 내 대학교 원서 접수일이었다. 정시였고 적당히 안정권인 학교들로만 원서를 썼기 때문에 가족들은 합격을 거의 기정사실로 하고 있었다. 때문에 할머니의 장례식에서 우리 가족은 축하와 위로를 함께 받았고, 나는 거기에 더해 술까지 같이 받았다. 친척들이 모인 자리에서 어른들 술상에 끼게 된 건 처음이었다. 갓 스무 살이 된 나는 감미료의 요상한 단맛에 진저리를 치면서도 잔을 받았다.
불콰하게 술기운이 오른 어른들은 할머니 이야기를 하시기 시작했다. '그래도 아흔 다 되어 오래 아프지 않고 돌아가셨으니 호상이다'로 시작된 이야기는 점차 과거로 거슬러 올라갔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나는 스무 해 동안 몰랐던 친가 이야기를 들었다. 아빠의 형제는 원래 4남매가 아니라 5남매였다는 것. 할아버지가 병으로 돌아가시고 얼마 되지 않아 형제 중 가장 똑똑하고 의젓했던, 집안의 기둥이었던 장남이 공군에 입대했다가 훈련 중 사고로 사망했다는 것. 그 뒤로 할머니는 성격이 180도 변해 매사에 무덤덤해지셨다는 것.
처음 듣는 이야기에 놀라 "그럼 그전에는 그렇게 무심하지 않으셨냐"고 여쭤보았더니, 어른들은 "전혀 아니었다"고 하셨다. 기쁨 슬픔 확실한 분이셨고, '성격 되게 강한' 분이셨다고.
영정 사진을 바라보았다. 카메라를 바라보며 서툴게 입꼬리만 올린 할머니가 보였다. 그 얼굴이 희로애락을 띠는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 보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평생 본 적 없었던 탓이다. 한때 저 얼굴에도 웃음과 울음이 폭넓게 담겼었다니.
"유언이 '아등바등 살지 마라.'셨어요. 그 말씀이 계속 생각나네요."
엄마가 말했다.
아등바등 살지 마라, 아등바등, 아등바등….
영정 사진을 계속 바라보며 아등바등이라는 단어를 입안에 굴렸다. 엄마처럼 나도 이 단어가 괜히 마음에 남았다. 고작 네 음절짜리 단어에 할머니의 삶이 녹아 있는 것 같았다.
마음속으로 할머니께 말을 걸었다. 불편해해서 죄송했다고. 편히 쉬시라고.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5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삶이 고될 때 이따금 '아등바등'이라는 단어를 입에 굴린다. 대부분은 의대에서 시험 준비하면서 온종일 책상 앞에 앉아 있을 때지만, 그 외에 아르바이트하고 밤늦게 지하철을 탈 때나 인간관계가 너무 어렵게 느껴질 때도 할머니의 단어는 여지없이 툭 튀어나온다.
지금 너무 아등바등 사는 건 아닌지.
그럼 다시 또 생각하곤 한다. 인생에서 욕심나는 것이 있으면 그게 무엇이든, 그게 없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 아등바등 매달리지는 말자고. 그런 것쯤, 사실 없어도 그만이지만 있으면 더 좋을 테니까 하는 것일 뿐이라고. 공부만 해도 그렇다고. 꼭 높은 성적 받을 필요 없고 꼭 제때 진급할 필요 없지만, 환자들 볼 때 더 자신 있게 보고 싶고 빨리 한 명의 어엿한 의사로서 환자들 만나고 싶으니까 하는 거라고. 그러고 나서 하던 일을 계속하면 하는 일은 똑같더라도 마음은 한결 편안하다. 세상은 사실 한바탕 잔치인데 나는 너무 자주 세상을 시험장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존경하는 선배 한 분이 그런 말씀을 해주신 적이 있다. 행복한 의사가 좋은 의사는 아니지만, 좋은 의사는 필연적으로 행복한 의사라고. 나는 의사가 스스로 마음에 여유가 있어야만 환자들에게 깊게 공감할 수 있다고 믿는다. 사랑과 행복은 그 자신을 먼저 채워야만 흘러넘쳐서 타인에게 진정으로 도달할 수 있으니까.
무언가에 집착하지 않고 아등바등하지 않아서, 그래서 나를 넘어 환자에게 닿을 수 있는, 그런 의사가 되고 싶다. 엄마 말대로 할머니가 마음속으로는 나를 아끼셨지만 표현하지 못하신 거였다면, 하늘에서 편히 쉬시는 지금은 손녀딸 응원해 주고 계시겠지.
아등바등하지 말고 오래 행복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