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의 중심, 의료이용 문화 특수성 때문...의대 교수들 '신중론' 제기
정부가 올해 안에 만성질환 '단골의사제도'를 도입하겠다는 방침을 밝힌 가운데, 우리나라의 독특한 의료환경을 고려할 때 단기간내 전면적인 도입은 어렵다는 지적이 학계에서 제기됐다.
국민건강보험공단 보험정책연구원 주최로 27일 건보공단 대강당에서 열린 세미나에서 윤석준 고려의대 교수(예방의학)은 "단골의사제도가 정착된 영국 등 다른 국가와 비교할 때 우리나라는 일차의료를 주도하는 인력 구성과 국민의 의료이용 전통이 매우 다르다"고 지적했다.
즉 한국은 일차의료를 담당하는 의사 대부분이 전문의라는 특수성이 있으며, 국민은 자유롭게 의사를 선택해 온 전통이 있어왔다는 것.
단골의사제도의 모델로 꼽히는 영국의 경우 몇 백년 전인 중세 길드시대부터 일종의 주치의 제도가 형성돼 왔기 때문에 제도 정착이 쉬웠지만, 우리나라는 상황이 전혀 다르다는 주장이다.
윤 교수는 "이같은 한국의 의료환경이 단골의사제도 도입의 '장애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면서 "제도 도입의 가장 큰 전제조건인 의료전달체계 복원이 단기적으로 요원하기 때문에 10년내 단골의사제도가 도입된다는 것은 지극히 비관적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그는 또 "단골의사제도는 우리나라 문화 속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져야 하는데, 국민이나 의사가 '불필요'하다고 인식하면 도입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특히 제도 도입의 필요 근거로 제시되는 설문조사 결과를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고 강조했다. 즉 설문조사에서는 대부분 국민들이 '필요하다'고 응답하지만, 이는 자유로운 의료이용이 보장되는 한도 내에서만 찬성한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윤 교수는 "국민들은 단골의사제도가 '나에게 유리하다'는 판단이 들어야만 제도 정착이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정부 6개월내 도입? 전혀 불가능하다"
또 다른 토론자인 유원섭 을지의대 교수도 신중한 추진을 주문했다.
유 교수는 "단골의사제도는 추가 재정이 소요되므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고, 의료인 교육 프로그램과 서비스 개발이 필수적이지만 단기간내 이루기 어렵다"면서 "특히 의료기관과 환자의 참여율·지속율이 관건인데, 시범사업 결과가 예상보다 호응이 좋지 않게 나타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는 또 "민간의료기관이 선뜻 참여하지 않을 것"이라면서 "참여 기관에 인센티브를 주는 정도로는 낙관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단골의사제도의 조기 도입이 어렵다는 입장에는 건보공단의 연구용역을 추진 중인 이재호 가톨릭의대 교수(일차의료연구회장)도 동의하고 있어 눈길을 끌었다.
그는 이날 주제발표를 통해 "일부 언론에서는 6개월내 도입될 것이라고 보도했는데, 이것은 현실적으로 절대 불가능한 이야기"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또 "단골의사제도 도입으로 국민 1인당 연간 외래 방문회수가 11.8회에서 OECD 평균이 6.8회로 줄어들 경우, 국민의료비 절감규모는 매우 클 것"이라면서도 "평균수명 연장으로 인한 의료비 증가 부분 등 여러 조건을 감안할 때 제도의 효과를 비용-효과적 측면으로만 판단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밝혔다.
특히 "개인의 의료이용 선택의 자유를 자제해야 하는 심리적 부담에 따른 비용까지 고려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건보재정 절감을 단골의사제도 도입의 당위성으로 여기는 주장을 우려했다.
정형근 공단 이사장 "시행 쉽지 않겠다"
토론회를 마친 후 정형근 건보공단 이사장은 "만성질환자가 많은 노인의 건강관리를 위해 단골의사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는 필요성은 느끼지만 시행이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다"라며 "의료비지불체계, 의료전달체계, 국민의 의료문화 등 여러 문제들을 시범사업을 통해 잘 검증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이날 이재호 교수는 단골의사제도 도입 모형으로 우선 고혈압·당뇨·고지혈증을 대상으로 하고, 참여하는 의사와 환자에게 일정한 인센티브를 주는 1단계 프로그램을 실시한 후 궁극적으로 만성질환자는 인두제, 나머지 환자는 행위별수가제도를 병용하는 방안을 제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