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는 의사에게 무엇을 원하는가. 이 시대의 사회는 의사에게 최고의 전문성을 통해 사회구성원의 질병치료와 관리를 담당해주기 바란다. 거기에 더해 의사로서의 직업전문성을 발휘하여 사회체계의 운영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능력을 발휘해줄 것을 기대한다.
그 기대가 때로는 과도하기도 하고 기대에 상응하는 보상을 해주지 않기도 한다. 그 중 하나가 법조인과 행정부서에서 장애인들의 장애정도를 평가해 줄 것을 요청하고 의료인들의 평가결과를 신뢰하는 것이다.
특히 전문의에 의한 노동능력상실률의 평가가 전제되는 손해배상 사건의 경우 신체감정결과가 피해자 권리구제 차원에서 분쟁해결의 핵심적인 요소로 기능하고 있어 의사들은 보다 조속하고 명확한 신체감정을 요구받고 있다.
이러한 다양한 사회적 요구에 의료계의 장애평가 참여는 체계적이지 못하였다. 몇몇 학회가 있기는 하나 의대교육이나 전문의과정에서 정규로 가르쳐지지 않고 있고 개인적으로 관심이 있는 의사들에 의해 시행되고 있다. 표준화 또한 잘 안 되었다.
약 10여 개의 소관 부처가 관리하고 있는 장애평가 관련 국내 법률은 약 20여 가지이며 보험회사 등의 관련 기관의 약관까지 포함한다면 장애평가기준의 종류로 20종을 웃돌 것이다.
문제는 이렇게 많은 수의 장애평가기준이 단일 평가기준이 아니며, 각기 다른 형태의 기준을 적용하고 있어 평가를 하는 의사나 평가를 받는 대상자 모두에게 혼란을 야기시키는 것이 현실이다.
문제는 여기에서만 끝나지 않는다. 우리 사회가 활용하는 장애평가는 관련 교육도 없이 간단한 업무지침에 의하여 행해지고 있어 같은 장애 상태에 대해 각기 다른 평가가 내려지는 등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
행정부나 사법부 그리고 보험사들은 이런 현상을 통해 의사들의 장애평가 대신 다른 인력을 활용할 계획도 세우고 있다.
그러나 장애의 유무와 정도를 판단해야 하는 장애평가는 전문적인 의학지식이 없으면 제대로 평가하기 어렵다. 특히 장애평가는 전공 이외의 분야에 대해서는 평가하기 어려운 지식과 판단력이 필요한 작업이기에 의사 이외의 전문 인력 양성에 대한 논의는 무리한 생각이다. 즉, 장애평가는 의사의 의무이자 권리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을 비롯한 OECD 국가에서는 중앙의사단체에서 단일 평가기준을 운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의사·의학 단체의 기준이 없고 국가도 종합적 계획 없이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제정하였기 때문에 장애평가 기준은 정교한 체계를 갖지 못하고 있다.
2007년 장애인과 관련된 모든 사업에서 가장 기초가 되는 장애평가기준을 정립하기 위하여 보건복지가족부에서는 140여 개의 전문 학회로 구성된 대한의학회로 하여금 한국장애평가기준개발사업을 의뢰하였다.
각 학술단체에서 추천을 받은 약 120여 명의 연구진이 장애평가기준개발위원회를 구성하여 3여 년 동안 여러 차례의 교육과 모임 등을 통하여 대한의학회 장애평가기준을 개발하고 있다.
드디어 2010년에는 대한의학회 장애평가기준 제1판 발행이 예정되어 있다. 이에 따라 대법원과 각 보험회사 그리고 행정부에서 기존의 맥브라이드와 법령의 기준대신 대한의학회 기준에 따라 판단하게 될 것이다. 이럴 경우 이 기준의 영향력은 대단히 커져 자원배분 구조의 변화가 예상된다.
특히 앞으로 7개월동안 2여 년 간의 연구를 통해 개발된 장애평가기준안을 서울시 성북구·송파구, 충청남도 천안시, 광주광역시 남구 등의 4개의 지역의 신규 등록 장애인과 재판정 장애인을 대상으로 실제로 적용해보는 모의적용사업이 진행 중이며 모의적용사업을 통해 장애평가기준의 완성도를 높이게 될 것이다.
그 이외에도 여러 가지 방법으로 현재까지 개발된 대한의학회 장애평가기준을 실제로 적용해보고 적용상의 어려움 등을 계속적으로 확인하며, 계속 보완해 나갈 것이다.
여기에는 재판부와의 협의 그리고 실제 손해배상업무에 적용, 또 경험 많은 고문과 자문위원의 조언도 받는다. 뿐만 아니라 모든 장애를 한 줄로 세우는 전신장애율 책정을 위한 학회 사이의 의사결정기구를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장애평가기준 개발에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다. 물론 미국의 장애평가기준이 많은 참고가 되며 다른 나라의 기준도 도움이 도지만 우리 사회에 적합한 대한의학회의 장애평가기준 개발은 우리 각 의료분야의 합의도출을 전제로 하여 이루어진다.
의학계의 관심과 참여가 있어야만 법조계·행정부가 받아들일 수 있는 객관적이고 과학적이며 합리적이며, 유용하고 실용적인 장애평가기준을 개발할 수 있다.
우리 기준은 장기장애율과 노동력상실률을 포함하며 모든 장애를 하나의 기준으로 전신장애율로 표현할 수 있도록 하는 합의과정을 남기고 있다. 이를 위해 활발한 의견개진과 참여가 필요하다.
물론 우리의 새 기준에 따라 평가는 같은 하나의 잣대로 하더라도 배상 또는 보상에는 각 개별 법률과 계약의 취지에 따라 다른 방식이 적용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 의학계에서 장애평가기준을 정립하고 사법부와 행정부가 이를 인정하면 사회의 필요를 전문성을 통해 반영해주는 또 하나의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며 사회의 자원이 공정하게 배분되게 하는데 기여하여 사회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이다.
※ 이 글은 의협신문의 입장이나 편집 방침과 같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