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대 '신사임당상'에 추대된 연당 박영옥 원장
처염상정(處染常淨). 진흙과 같은 탁한 곳에서 자라도 탁한 것에 물들지 않고 맑고 향기로운 모습을 간직하는 연(蓮)을 이른다. 비가 잦아지면 피고지기를 반복하다가 해가 들면 서서히 꽃잎을 열고 해가 지면 닫는, 어쩌면 인간과 너무나 닮은 모습을 간직한 연꽃. 뿌리를 내린 바닥에는 오물이 즐비해도 고고한 자태를 품은 더 없이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그에게서 삶의 지표가 되는 덕을 배운다. 연당(蓮堂) 박영옥(서울 영등포·전 서울병원장). 일흔을 훌쩍 넘겨 여든을 앞두고 있지만 선생은 사그라지지 않는 사랑과 열정으로 삶을 일구며 곁을 밝힌다. 연당 선생이 17일 대한주부클럽연합회가 선정하는 제43대 '신사임당상(像)'에 추대됐다. 일제강압통치와 한국전쟁 등 유난히 혼란스러웠던 역사의 격변을 지나오며 여의사로서,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살아온 시간이 남긴 흔적은 무엇일까. 연당 선생의 삶을 거슬러 그 안에 스며든 신사임당의 모습을 찾는다. |
선생은 지난해 40년 동안 이어온 개원을 마무리하고 병원 뒷켠 묵향이 짙게 밴 작업실에서 평생을 이어온 글씨 쓰기와 더불어 소소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누구보다 치열하게 엮어온 시간 속에서 이번 수상은 선생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가깝게는 제 친정어머니를 먼저 생각합니다. 저희 아이들을 돌봐주시며 여생을 보내셨기에 제가 이런 영광을 누리는 것 같습니다. 집안의 중심은 어머니이고 어머니의 행동에 따라 행복과 안녕이 보장됩니다. 모든 어머니들의 표상이 될만한 모습으로 더 열심히 살겠습니다."
부군(김종환 전 서울병원장)과 딸(김정원 동하산업 이사·서랑 서교일 순천향대학교 이사장)·아들(김한수 서울의대 교수)에 대한 각별한 마음도 전했다.
"남편과는 평생을 동역자로 살았습니다. 마음이 고운 사람입니다. 서로에 대한 존경속에서 함께 의논하고 의지하며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잘 자라준 아이들에게도 고마움이 앞섭니다. 각자가 사회의 일원으로서 제 역할을 다하고 있어 감사할 따름입니다.
아이들이 자랄 때 평소 신조인 '하면 된다'는 의지를 나누려고 애썼는데 모두 잘 따라줬습니다. 오늘이 있기까지 가족은 제 열정의 화수분이었습니다."
선생은 어떻게 의업의 길에 들어섰을까? 그리고 그 길을 마무리한 지금 후배 여의사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일까.
"광복 전 개성에서 살았습니다. 할아버지는 김 구 선생과 함께 우국노인회 일을 하셔서 몇 번 뵌 적이 없었고, 그러다가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외가의 도움으로 서울로, 인천으로, 부산으로, 다시 서울로 솔가를 하며 그 시절 누구나 겪었을 고난을 지나왔습니다.
집안 형편은 고등학교를 마치고 취업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다른 이를 도우면서 의미있는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에 의대를 지원하게 됐고 제 뜻을 존중해주신 외삼촌의 도움으로 의사의 길에 들어선 후 오늘에 이르게 됐습니다. 지금의 여의사들은 모든 면에서 우리 때 보다는 훌륭한 점이 많습니다.
학문적 소양도 앞서고 능력도 출중한 사람들을 보게됩니다. 그러나 세상을 바라보는 올바른 인식과 삶에 대한 명확한 목표가 없다면 좋은 결실을 거두기 어렵습니다. 후배들의 건투를 빕니다."
서예에도 일가를 이룬 선생은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1983년 제1회 한국민족서예전 특선을 시작으로 한국서화예술대전 특선(1988)·대상(1989), 대한민국서예대전 특선(1991), 한국서도협회 초대작가상(2002) 등을 수상했다. 선생에게 서예는 가족과 스스로에 대한 '사랑'이었다.
"사실 처음 붓을 잡은 것은 아이들 때문이었습니다. 아이들이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공부하는 곁을 붓을 잡고 같이 보냈습니다. 원래 뭔가 시작하면 끝을 보는 성격인지라 그렇게 시작한 글씨공부가 날을 보태고 해를 더하면서 서예의 깊은 맛에 빠져들게 됐습니다.
그동안 김영기·김충현·김상영 선생님을 사사했고 지금도 붓을 놓고 있지 않습니다. 서예는 마음을 다스리는 공부이고 세상을 살아가는 도덕률이라고 생각합니다. 처음 붓을 들고 서툰 놀림일지라도 한 일(一) 자를 반복해서 쓰다보면 예와 기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찾아갈 수 있습니다. 어느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글씨체 가운데는 예서를 가장 좋아한다는 선생은 팔순이 되는 내후년 쯤 다섯번째 개인전을 계획중이다.
"글씨는 덧칠을 하지 못합니다. 정성과 기운이 깃든 일필휘지 담백함의 예술입니다. 그 안에는 자유로움과 즐거움이 있습니다. 또 어머니로서 간직해야할 마음을 올곧이 다스릴 수 있는 지혜가 있습니다.
1986년에는 첫 개인전 이후 1991년에는 서예대전 특선을 기념해 두번째 전시회가 있었고, 2004년 칠순기념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팔순 때는 삶을 되돌아보며 다섯번째 개인전을 열고 싶습니다."
선생은 1995년 시작한 비행청소년이나 전과자 선도 활동을 통해 강팍하고 응어리진 그들의 가슴을 달래줘 왔다. 그것은 어머니의 마음이었다.
"그들의 어긋난 삶은 모두 가정에 비롯됩니다. 대부분이 결손가정이었고 무관심에 방치된 아이들이었습니다. 기관을 통해 아이들을 소개받고 1년 여를 함께하게 됩니다. 밥을 같이 먹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진솔한 마음을 전해주면 조금씩 아이들의 마음도 열립니다.
아이들을 사회가 책임지게 하지 않으려면 가정에서 그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그들과 함께 하며 그들이 변해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소중하고 의미있는 일이었습니다."
선생은 지금 또 다른 인생을 마음에 담는다. 40년 동안의 개원생활을 접고 쉬고자 했던 잠시동안의 여유로움을 뒤로하고 사회적으로 도움이 되고 선생을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어느 곳이라도 찾아갈 작정이다. 때로는 의사로, 때로는 서예가로, 때로는 어머니로….
연당은 '연꽃이 넓게 머무는 집'이라는 의미로 스승께서 내려준 아호다. 질곡진 세상을 밝히는 연꽃의 영롱한 낯빛과 그윽한 향기가 그 곳에 영원하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