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으론 '국민편의' 속으론 '재고약 해결'
국민편의 위한다면 '선택분업' 찬성해야
Cover Story
18대 국회 막바지에 난데없는 '처방전 리필제'가 불거져나와 의료계를 황당케 하고 있다.
7월 초 민주당 이낙연 의원이 처방전 재사용 허용을 골자로 한 의료법 개정안을 발의할 예정이라는 소식이 알려져 의료계가 강하게 반발하자 이 의원 스스로 '사실무근'이라고 해명한데 이어 같은 당 김영진 의원은 8월 2일 개정안을 제출했다가 공동발의 의원 중 일부가 서명을 취소하자 법안을 철회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현재 국회에 제출된 처방전 리필제 법안은 한 건도 없는 상태지만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무언가 심상치 않다는게 의료계 분위기다.
처방전 리필제의 정확한 용어는 처방전 재사용이다. 김영진 의원이 제출했다 철회한 법안은 고혈압·당뇨 등 보건복지부가 지정한 만성질환자를 진료한 의사가 장기복용이 필요한 의약품의 처방전을 발행하는 경우 처방전의 재사용 여부 및 재사용 횟수 등을 정하도록 규정했다.
환자가 원한다고 해서 무조건 재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법안은 재사용 여부와 횟수를 의사의 판단에 맡겨 놓았다. 그러나 이는 전혀 실효성이 없다는 것이 의료계 주장이다. 의료기관, 특히 단골환자를 주로 보는 동네의원에서 환자의 요구를 거부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기 때문이다.
리필제는 약계 '전가의 보도'
최근 국회의 처방전 재사용 법안 추진 움직임은 약계가 처방전 리필제를 강하게 요구하고 나선 시점과 정확히 일치한다. 대한약사회는 6월 18일 상임이사회에서 처방전 리필제를 즉각 시행할 것을 촉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이어 7월 1일에는 주요 일간지에 광고를 내고 처방전 리필제가 조속히 시행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앞서 6월 1일 복지부 산하 보건의료미래위원회가 처방전 리필제를 세부 아젠다에 포함시키지 않기로 결정했다.
정부가 고려하는 정책대상이 아니라는 의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계가 요구의 수위를 낮추지 않는 것은 정부의 일반의약품 슈퍼판매 추진에 대한 반대급부를 노리는 정치적 흥정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의료계의 시각이다. 약계가 처방전 리필제를 정치적 거래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새삼스런 일이 아니다.
의약분업 도입 당시부터 현재까지 중요한 의료현안이 대두될 때마다 처방전 재사용 사안을 들고 나왔다. 2000년 의·약·정 협의에서 약계는 처방전 리필제도 도입을 강력히 요구했으며, 결국 2001년 보건복지부가 건강보험 재정안정화 대책으로 동일 처방전에 따른 반복 조제 방침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같은 해 복지부가 이 방침을 철회함으로써 리필제는 백지화됐지만 이후에도 약계의 요구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2003년 6월부터 강제화된 처방전 2매 발행 역시 처방전 리필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시민단체와 정부, 약계의 합작품인 처방전 2매 발행제도는 표면적으로는 환자의 알권리 충족이었지만 이면에는 '리필제'가 자리잡고 있었다 것이 의료계의 판단이었다. 당시 의료계는 "처방전 2매 발행은 처방전 리필로 가는 전단계"라며 강력히 반발했지만 국민의 알권리라는 당위론에 밀릴 수 밖에 없었다.
리필제 요구하는 진짜 이유
처방전 리필제에 반드시 따라오는 수식어는 '국민의 편의'다. 처방전 재활용을 통해 만성질환자가 동일한 처방전을 받기 위해 반복적으로 의료기관을 방문하는 번거로움을 해소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국민의 편의라는 껍데기를 한꺼풀 벗겨내고 들여다보면 약계의 속내는 엉뚱한데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지난해 6월 수원 광교산 앞에서는 수십명의 약사들이 의약품을 쌓아놓고 불태우는 생경스런 장면이 연출됐다. 이들은 경기도약사회 소속 회원들로 이날 불태워진 의약품은 '악성 재고약 반품 거부 업체'로 지목된 대한○○ 등 5개사의 제품이었다. 재고 의약품 문제는 약계의 오랜 골칫거리다.
약계는 재고약 문제를 의사의 처방약이 수시로 바뀌는 탓으로 돌리고 있다.
실제로 지난 1월 약계 전문언론인 데일리팜이 개국약사 523명을 대상으로 '약국을 운영하면서 겪고 있는 가장 큰 애로사항'을 물어본 결과 가장 많은 32.8%가 '과도한 처방약 변경'이라고 답했다. 인근 병의원이 처방약을 갑자기 바꾸면 그 전까지 조제하던 의약품은 고스란히 재고로 남게 된다는 것.
서영준 경기도약사회 부회장이 지난해 중부권약사학술대회에서 발표한 '반품사업을 통한 약국 경영상의 손실 금액에 대한 고찰'이란 제목의 논문을 보면, 2008년 대한약사회가 주도한 불용 재고 의약품 반품사업에 참여한 약국은 모두 1495곳으로 이들 약국의 총 재고약 규모는 31억7029만원에 달했다.
이는 약국 한 곳당 212만원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단순 금액만 이 정도이고 반품약 처리에 소요되는 시간적·정신적 비용까지 고려하면 불용 재고약은 약국 경영의 암적인 존재라는 것이 약계의 하소연이다.
약계가 불용 재고약에 얼마나 민감한가를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 있다.
지난해 4월 한국MSD는 폐경 여성용 호르몬제인 '리비알정'을 기존 포장단위 30정에서 28정으로 변경해 출시했다. 14일·21일·28일 등 주 단위 처방이 많은 외국의 현실을 반영한 28정 포장은 다국적 제약회사로서는 당연한 선택이었다. 그런데 한국 약사들이 발칵 뒤집어졌다.
국내에선 보통 30일치 팩 단위로 처방이 나오는데 28정 단위로 나오면 2정이 모자라 새 포장을 뜯어야 하기 때문이다. 약사들이 치를 떠는 이른바 '개봉 불용약'이 늘어나는 셈이다. 의약품이 제네릭으로 새로 풀릴 때마다 약사들은 혀를 찬다.
수 십개에 달하는 제네릭 가운데 인근 의료기관에서 처방하는 의약품이 무엇인지 알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가격이 높은 의약품일수록 재고는 더욱 큰 골칫덩이로 남게 된다.
조제료 챙기면서 건보재정 걱정?
약계가 성분명처방 제도를 끈질기게 주장하는 이유가 바로 악성 재고 의약품 때문이라는 사실은 이미 알려진 비밀이다. 성분명 처방을 의무화하면 약사는 동일 성분 가운데 약국에 재고가 있는 의약품을 입맛대로 골라 조제할 수 있게 된다. 약사들에게 성분명 처방은 의사의 처방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는 해방구인 셈이다.
처방전 리필제 역시 마찬가지다. 의사가 장기간 동일 약품을 처방하게 됨으로써, 잦은 처방약 변경에 따른 재고 리스크를 상당 부분 해소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처방전 리필제는 마치 쌍둥이처럼 약계가 발표하는 각종 성명서·결의문·건의문 등에 나란히 등장한다. 그리고 예외없이 '환자의 편의성 증대와 건강보험 재정 절감'이라는 문구가 곁들여진다.
성분명 처방으로 건보재정을 절감하는 것은 약사들이 수 많은 제네릭 중에서 저가 의약품만 골라 조제했을 때 가능한 일이다.
제네릭마다 차이가 나는 약리적 효능, 즉 환자에 대한 치료효과는 배제한 논리다. 의사의 진료권·처방권은 아예 고려조차 되지 않는 일방적 주장이다. 약계가 진정으로 건보재정 절감을 원한다면 약국 조제료 절감 부터 앞장서라는게 의료계 입장이다.
전국의사총연합에 따르면 의약분업 이전 의사의 건당 조제료 100∼500원이었던데 약사의 건당 조제료는 2010년 기준5900원으로 수십 배나 증가했다.
연간 조제료 역시 2000년 3896억원에서 2009년 2조6000억원으로 6.7배 늘어났다. 우리나라 약국의 조제료에는 조제기본료 외에도 복약지도료·약국관리료·의약품관리료·퇴장방지의약품사용장려비 등이 포함돼 있다. 다른 어떤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희귀한 항목들이다.
보건복지부가 지난 6월 약 1000억원 규모의 약국 조제료를 인하키로 결정한 것은 그동안 건강보험 재정에 약국 조제료가 부정적 요인으로 자리잡고 있었다는 사실을 반증하고 있다.
환자 편의 위해서라면 '선택분업'
환자의 편의성 증대 주장 역시 의료계는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이 2009년 1월 고혈압·당뇨병 등 만성질환을 앓고 있거나 경험이 있는 노인 605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73%가 처방전 리필제에 찬성한다고 답했다.
그러나 만성질환자자, 특히 거동이 불편한 노인을 대상으로 한 조사라는 점에서 신뢰도가 매우 떨어진다.
반면 2004년 한국갤럽이 전국 성인 남녀 1051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환자가 원하는 경우 병·의원에서도 약을 조제받을 수 있는 국민선택분업제도'에 대해 72.6%가 찬성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10년 7월 한국리서치가 전국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 결과 역시 응답자의 73%가 의료기관에서 의약품 조제를 받기 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환자를 위한 진정한 편의성은 '원내 조제'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다.
한편 약계는 처방전 리필제의 도입 근거로 외국의 실태를 내세우고 있다. 미국·캐나다 등 북미 지역과 이탈리아·덴마크·헝가리 등 유럽 일부 국가에서 처방전 리필제를 시행하고 있다는 것. 그러나 우리나라와 의료접근성에서 큰 차이를 보이는 국가들과 비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게 의료계의 지적이다.
이재호 대한의사협회 의무이사(내과 전문의)는 "미국이나 유럽 국가들은 의료비 부담이 크고 전문의 진료를 받기 어려워 어쩔 수 없이 리필제를 제한적으로 도입한 나라"라며 "한국처럼 의료 접근성이 뛰어난 나라에서 인위적으로 환자-의사 사이에 장막을 쳐야할 이유는 없다"고 말했다.
재사용 처방전 약화사고는 누구 책임?
무엇보다 환자의 안전을 고려할 때 리필제는 대단히 위험한 발상이라는 지적이다. 이 이사는 "만성질환자는 임상증상이나 합병증이 시시각각 달라지는 특성을 갖고 있다"며 "대부분 복합상병을 갖고 있는 만성질환자를 진료할 때는 동반 질병도 반드시 함께 관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의학계에 따르면 당뇨병을 지속적으로 관찰하지 않을 경우 당뇨병성망막증·당뇨병성신증·당뇨병성말초신경염 등이 발생할 수 있고 최악의 경우 당뇨병성 고삼투성 혼수 등 치명적인 합병증에 노출될 수 있다.
고혈압도 마찬가지로 정기적인 진단이 없으면 뇌혈관·심혈관계 이상 징후를 조기에 발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김육 대한내과의사회 공보이사(내과 전문의)는 "협심증·심근경색 같은 질환은 환자와 대화만 나누어도 진단이 가능한데, 환자가 병원에 오지 않고 약국에서 약만 타가면 진단의 기회는 원천적으로 차단된다"고 말했다.
약화사고에 대한 우려도 빼놓을 수 없다. 국회 입법조사처는 2009년 국정감사 정책자료에서 "만성질환자라 할지라도 증상의 역동(dynamic)에 입각한 치료적 처방이 가장 중요하다"면서 "임상 실제상 일정한 시점에서 각각의 진료행위별로 작성된 처방전이 그 시점을 넘어 장기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의사의 진단 없는 처방전의 재사용은 치료의 부적합성을 초래할 우려가 크다는 지적이다. 특히 "개별증상에 대한 적합한 치료가 이뤄지지 않아 약화사고가 발생할 경우 이에 대한 책임소재가 불분명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일반적인 처방전에 따른 투약으로 인해 환자에게 사고가 일어났을 경우의 책임은 주로 처방한 의사에게 있지만, 리필된 처방전에 입각한 투약사고는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리필제 국회 통과 가능성 '희박'
김영진 의원은 처방전 리필제를 담은 의료법 개정안을 재추진하겠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개정안이 발의 되더라도 국회를 통과, 시행될 가능성은 현재로선 매우 낮아 보인다. 내년 4월 총선을 앞둔 상황에서 18대 국회가 법안을 심의할 수 있는 실질적인 기간은 8월 임시국회와 9월 정기국회 뿐이다.
그러나 8월 5일 현재 보건복지위원회에 계류 중인 법안이 전체 상임위 가운데 가장 많은 903건에 달하는데다, 정기국회는 예산 부수법안을 우선 처리한다는 원칙을 감안할 때 찬반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처방전 리필제 법안이 2개월도 채 안되는 기간내 사회적 합의를 거쳐 국회를 통과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러나 의료계는 틈만 나면 수면위로 고개를 내밀고 이슈의 중심으로 부각되는 처방전 리필제 논란을 더이상 간과할 수 없다는 분위기다. 특히 근거가 박약한 논리로 리필제의 필요성을 왜곡 주장하며 여론을 호도는 시도에 대해 강력히 대처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재호 의무이사는 "처방전 리필제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주장"이라며 "불순한 의도로 리필제를 주장하는 세력에 대해 단호히 대처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