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관 지시로 의학적 소견 무시…엉뚱한 예산 집행 '당혹'
각종 훈련 지원에 진료환경 박탈 "의사 자존감 무너져"
"전역만이 살 길이다." 군의관들 사이에서 심심찮게 나도는 말이다. 단기 의무복무로 3년을 군에서 보내는 이들은 의사이면서 군인 신분인 까닭에 어느 쪽에도 끼지 못하는 애매모호한 상황에 빈번히 부딪힌다.
"그래도 일반 병사보다 월등한 처우를 받고 있지 않느냐"는 부러움 섞인 시선은 별로 위안이 되지 않는다. 오진을 비롯한 진료 소홀이 잇따른 군 의료사고의 주범인 양 도마 위에 오를 때마다 억울함을 호소하는 군의관들. 문제는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일까.
경남 지역에서 군의관으로 복무 중인 외과 전문의 A씨. 강원도 GOP에서 1년을 근무하고 의무대로 자리를 옮긴 그는 지휘관과의 마찰로 한 동안 곤욕을 치렀다. 진료 과정에서 의학적인 소견을 병사들에게 얘기할 때마다 해당 부대 간부들의 의도적 방해가 이어진 것.
얼마 전 기동대대 병사가 특공무술 시범을 하다가 발목을 심하게 다쳐 의무대를 찾았다. 그는 스프린트 및 활동 제한을 지시했지만, 행사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간부의 명령이 뒤따랐다. 강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군의관의 소견은 가볍게 무시됐다.
A씨는 "상관의 한마디만으로 병사의 치료받을 권리가 박탈되기 일쑤다. 본인(간부)들은 오랜 군 생활 경험으로 괜찮다고 하는데, 의사인 내가 보기엔 전혀 그렇지 않다"며 울분을 토로했다.
유사한 사례는 군 의료현장에서 비일비재하다. 인턴 수련을 마치고 임관한 군의관 B씨는 대대 전술 훈련기간 중 삽에 찍혀 손 인대가 끊어진 병사를 치료하면서 겪은 불편한 기억을 떠올렸다. 수술이 필요한 긴박한 상황이었지만, 이를 보고 받은 대대장의 반응은 싸늘했다.
"죽을 병이야?"
당장 치료하지 않으면 손가락 장애가 올 수 있다는 설득은 통하지 않았다. 해당 병사는 몇달 후 휴가기간을 이용, 민간병원에서 다친 손가락을 간신히 치료할 수 있었다.
'의사? 군인?' 정체성 혼란 겪는 군의관
군의관의 사전적 정의는 군대 내에서 환자를 치료하는 임무를 담당하는 의사를 일컫는다. 민간의료와 마찬가지로 군에서도 별도의 의료전달체계가 갖춰져 있다.
의원과 같은 기능은 대대 및 연대급 의무대가 담당하고, 사단급에서는 2차 병원급 진료와 비슷한 직무를 수행한다. 군병원 및 수도병원은 군내에서 상급종합병원 역할을 한다.
전문의가 배치되는 군병원 및 사단급은 지휘 계통상 군의관이 군의장교(의사) 또는 의정장교(의무행정직)의 인사명령 체계 아래에 있기 때문에 의사로서의 직능적 제한을 거의 받지 않는 점이 특징이다. 군의장교는 각급 지휘관의 보건의료 관련 특수 참모 역할을 수행하는데, 이는 일반 참모들과는 별개의 직속 업무로 구분된다.
시설 좋은 군병원에 배치된 군의관은 전문적인 술기를 민간병원에서보다 집중적으로 익힐 기회를 갖기도 한다. 수도통합병원 군의관 출신인 신승섭 경희의대 교수(경희대병원 이비인후과)는 군병원에서 부상환자를 돌보며 코 성형 분야에 눈을 뜬 케이스다.
신 교수는 "이전에도 코 성형을 하는 소수의 이비인후과 교수들을 봐 왔지만, 긴박한 군 의료현장에서 풍부한 시술기회를 접한 게 결정적인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그러나 같은 전문의라도 사단급에 배치된 군의관들은 각종 훈련 의무지원에 동원돼 진료시간을 빼앗기고 있다며 불편함을 토로하고 있다. 병사들이 군의관의 진료를 받고 싶어도 제 때 받지 못하는 것은 각종 외부 응급대기에 시간과 자원을 낭비하고 있기 때문이란 지적이다.
한 군의관은 "사단장이 축구라도 하는 날에는 진료시간이라도 응급대기에 나가 있어야 한다. 의무대에서 자리를 지키고 진료해야 하는 기본 일과가 지켜지지 않고 있다"면서 "사단의무대 진료실에서 병사를 진료하는 비율은 30%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털어놨다.
군의관들은 각종 공연, 행사 의무 지원과 예비군 동원 훈련에 잡혀 상당 시간을 소비하고 있다. 이에 사격이나 훈련 등 응급대기는 응급구조사 자격증을 가진 부사관을 지속적으로 확보해 대기시켜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이 군의관은 "최근 일련의 군내 사고들과, 군의관의 진료를 받지 못해 스트레스로 자살한 병사들이 생기는 것은 군의관들이 알 수 없는 외부 응급대기에 모든 시간과 자원을 낭비하기 때문"이라며 "군의관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장병들의 진료는 반드시 계속할 수 있도록 불필요한 응급 대기를 줄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턴 수료 후 중위로 임관하는 대대와 연대급 군의관들의 상황은 더욱 열악하다. 군내에서 1차 진료를 담당하는 이들은 연대장 또는 대대장 인사명령 체계 아래 있으면서 비의료인에 의한 진료 간섭을 공공연히 받고 있는 실정이다.
의무대 분위기에 따라 군의관을 일반 전투병과 간부들과 동일시해 각종 군사훈련이나 회의에 참여하도록 강요하는 경우도 있다.
전공의 수련을 포기하고 임관한 군의관 C씨는 "행군 중 손목과 발가락뼈가 골절된 병사를 데리고 병원에 다녀왔는데, 지휘관은 '네가 간부 전투력 훈련에 가기 싫어서 환자를 만들어 간 게 아니냐'며 의심스런 눈초리를 보내 울컥했다"면서 "군의관 판단으로 움직이는 것 자체를 싫어해서 괜한 꼬투리를 잡는 것 같았다"고 했다.
"엑스레이는 만성 고장에 간단한 피검사도 못해"
지휘관과의 눈치 싸움에 이력이 난 군의관들은 열악한 진료 환경이라는 2차적 좌절을 경험하게 된다. 대대와 연대급에서는 청진기·설압자·이경만으로 문진 및 이학적 검사가 이뤄지고 있다.
기본적인 진단기기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지방 모 사단의무대에서는 실제로 간단한 피검사조차 진행할 수 없다. 의무대 내 반복적인 고장을 일으킨 엑스레이를 수리하러 온 정비기사가 "부품이 없어서 도저히 고치기 힘들다. 전국에 이 정도로 낙후된 엑스레이 기기는 3대뿐"이라며 돌아갔다는 웃지 못 할 사례도 전해진다.
의무병은 5명 편제이지만, 휴가와 각종 훈련지원, 작업 및 근무지원 등으로 평균 가동인원은 1.5명에 불과하다.
의료예산이 엉뚱한 곳에 쓰이는 사례도 부지기수다. 진료 최일선에 있는 군의관의 의견이 일절 반영되지 않는 비효율적인 예산 집행구조 때문이다.
군의관 A씨는 "어느 날 사단에서 관리할 수도 없고, 사용하지도 않는 혈액 보관 냉장고 2대와 800만원 상당의 수술용 침대가 떡 하니 들어왔다. 정작 작은 수술을 하려고 해도 수술용 장갑조차 제대로 공급해주지 않으면서 원하지도 않은 침대를 3대씩이나 갖다놓은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제발 자주 사용하는 약들이라도 떨어지지 않게 공급해 달라고 수차례 건의해도 돌아오는 대답은 고가의 혈액냉장고와 수술방용 침대"라며 "이러면서 군의관들에게 진료를 잘하라는 얘기는 군인에게 총도 제대로 쥐어주지 않으면서 전쟁에서 승리하라는 명령과 다를 것이 뭐가 있겠냐"고 꼬집었다.
군 의료체계 보강 TF 발족…군의관 관련 과제는 1개뿐
군 의료사고와 더불어 낙후된 진료환경이 여론의 뭇매를 맞으면서 군 의료체계에도 개혁의 바람이 불고 있다. 2014년까지 장기군의관의 처우를 국·공립병원 보수 수준으로 현실화하고, 사단급 의료시설 보강사업을 추진한다는 방침이 골자다.
국방부는 지난 5월 국방차관 주관으로 '군 의료체계 보강 추진위원회' 발족회의를 개최하고, 9월까지 약 4개월 동안 보강방안을 확정해 국회 등에 보고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최근 군 의료관련 사건은 시설장비가 노후돼 생긴 문제라기보다는 일선 부대에서의 환자 관찰 부족, 응급환자 후송 지연 등에 원인이 있는 것이라는 조사 결과도 발표했다.
국방부 차관이 위원장을 맡은 해당 위원회는 민간의사 5명, 간호대학 교수 1명을 비롯한 위원 6명과 기획재정부·복지부·총리실 국장, 의무사령관 등으로 구성돼 있다. 추진위는 매월 2주차 현장을 방문하고, 4주차에 정례회의를 열어 군 의료체계 보강을 위한 개선과제를 추진해왔다. 도출된 과제는 군 의무발전 추진계획에 반영된다.
위원들은 군 의무발전이 시설 장비 위주의 하드웨어와 진료 시스템 위주의 소프트웨어의 균형을 맞추면서 이뤄져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이를 위해 ▲우수 군의관 확충 및 단기군의관 동기 부여 ▲의료지원인력 확충 ▲병사 의료접근성 제고 ▲후송체계 재검토 ▲민간의료 연계 군 의료 보강 등 방안이 제시됐다.
추진위 진행과 맞물려 국방부 내에서도 국방 보건정책 방향을 정하기 위한 움직임이 급물살을 타고 있다.
지난 6월 14일 대전 국군의무학교 시뮬레이션센터에서 열린 '2011 의무병과 발전 세미나'에서 국방부 주요 관계자들은 단기군의관의 진료여건을 개선하기 위해 사단급 이하 진료능력 보강 TF를 8월까지 운영하고, 군 업무훈련 또는 복무지침 제정을 통해 진료에 전념할 수 있는 근무환경을 조성하는 방안을 논의했다.
국방부의 이러한 행보는 군에서 제대로 된 진료를 받고 싶은 군인들의 기대감을 어느 정도 충족시켜 줄 수 있을 듯 보인다. 의료시설을 대폭 보강하고, 군의관의 진료여건을 개선하기 위한 방안을 마련한다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진료권을 보장하기 위한 해결책이 빠져 있다는 점에서 군의관들이 체감하는 현실과의 괴리는 크다.
실제 군 의료체계 보강 추진위원회에서 정한 개선과제 12가지 가운데 군의관 관련 과제는 1개에 불과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마저도 아직 논의된 바가 없고, 지금껏 장병들의 질병예방 활동에 초점을 맞춰 회의를 진행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의료전문가인 군의관과 국방전문가인 군 간부들의 시각차가 두드러지는 대목이다.
국방부 소속 군의관, 진료권 독립 가능할까
군의관들은 가장 시급한 개선사항으로 진료권과 지휘권을 분리하는 것을 한목소리로 꼽는다. 장병들의 진료를 위해 군의관이 존재하는 것이지만 이 부분을 지휘관들이 이해하지 못하면서 갈등이 생긴다는 지적이다.
군에서 환자가 발생하면 지휘관들의 체면이 구겨지고 점수가 깎인다는 잘못된 인식도 원활한 진료를 어렵게 하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낡은 군 의료시설을 업그레이드하거나 백신 접종을 늘린다고 해서 장병들의 의료접근성이 나아질 수 없는 이유다.
군의관 A씨는 "병사들을 진료하고 이에 대한 책임을 지는 주체가 군의관이어야 하는데, 우리들의 진료나 처방이 더 높은 계급에 의해 과거부터 묵살돼 왔고 지금까지 바뀌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인식의 변화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의사로서 자존감이 무너지는 구조가 절망적"이라고 말했다.
지휘권에서 진료권을 독립시키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과제일까. 해결책은 이미 나와 있다. 현재 군병원급은 의무사령부 소속이지만 사단 이하 연대와 대대급에 편제된 군의관들은 국방부 소속이다. 이를 의무사령부 통합 관할로 변경하면 모든 장병들의 진료에 대한 부분을 의사들이 독립적으로 관할할 수 있게 된다.
몇년 전 군 의료체계를 개혁하기 위해 거론된 이 방안은 정치권과 국방부 내부 반대에 부딪혀 좌초됐다. 별도의 추진위원회가 발족, 각계 인사들이 모여 변화를 모색하기 위한 회의를 진행하고 있는 지금 시점에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유균혜 국방부 보건정책과장은 "지휘체계 개편 문제가 숙원이긴 하지만 현실적으로 굉장히 어렵다. 국회에서도 그런 부분에는 관심을 두고 있지 않다"면서 "지휘관 출신의 군인들이 국회로 가기 때문에, 오히려 군단장에 힘을 더 주고 의무사령부 권한을 줄여야 한다고 얘기하는 의원들이 많다"고 말했다.
유 과장은 "주변 환경과 여건이 맞춰져야 하는데 지금은 그 시기가 아니다"며 "추진위원이 군의사가 아니고 민간 위원으로 조직돼 있어 체제 개편에 관한 논의는 말도 꺼내기 힘든 분위기"라고 전했다.
이번 군 의료 보강 추진위 과제에서 '유일하게' 포함돼 있는 군의관 관련 개선안은 8일 열리는 4차 회의에서 논의될 예정이다. 국방부는 22일 5차 회의를 끝으로 추진위 활동을 마무리 짓고 결론을 도출한다고 밝혔다. 근본적인 변화는 기대하기 어려워 보이지만, 무언가 바뀌기를 원하는 전·현직 군의관들의 바람은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군의관 출신인 조병욱 광탄현대병원 부원장은 "군의관들이 하수인 역할밖에 할 수 없는 것은 소속 자체가 각급 지휘관 산하에 편제돼 있기 때문"이라며 "국군의무사령부에서 파견 개념으로 군의관에 대한 인사권과 지휘권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