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국 타개 위한 선택...회원들 동참 열기 고조
지난 7일 오후 의협 회관에서 열린 전국 의사 지도자 연석회의. 이날 회의는 16개 시도의사회장을 비롯한 지역·직역의사회 리더들이 한 자리에 모여 의협 대정부 투쟁의 방향을 논의하기 위해 급히 마련된 자리였다.
노환규 의협 회장은 이날 의협의 투쟁 전략이 담긴 로드맵을 처음으로 공개했다. 개원의·전공의 주 40시간 근무와 토요일 휴무로 시작되는 로드맵은 △평일 1일 휴진, 비응급수술 연기에 이어 △평일 이틀 휴진에 이어 △개원의 전면 휴폐업, 전공의 주중 2일 휴무 등 대선이 열리는 12월 19일까지 단계적으로 단체행동의 강도를 높이는 전략을 담고 있다.
노 회장은 로드맵을 설명한 뒤 "지금은 매우 중요한 시기다. 여러분의 지혜를 모아 달라. 계획이 성공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와 달라"며 읍소했다.
하지만 되돌아온 참석자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투쟁의 당위성에는 공감하지만, 전 회원이 동참하기에는 준비와 홍보가 부족하다는 이유였다. 한 지역의사회 고위 임원은 "대정부 투쟁은 1년 이상의 공론화 과정이 있어야 한다"며 "현재 수준에서 투쟁을 강행할 경우 결과는 불 보듯 뻔하다"고까지 말했다. 다른 참석자들 역시 "명분이 부족하다", "투쟁 이유가 피부에 와 닿지 않는다", "좀 더 때를 기다리자" 등 단체행동 돌입에 부정적인 의견이 대세를 이뤘다.
평소 당황하거나 주저하는 모습을 좀처럼 보이지 않는 노 회장도 이날은 달랐다. 믿었던 의료계 리더들이 예상외의 반응을 나타내자 발언 도중 잠시 말을 잇지 못하거나, 문득 천장을 응시하는 등 불안한 모습까지 비쳤다.
노 회장은 회원 94.2%가 의협의 대정부 투쟁을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난 설문조사 결과를 환기시키며 "의약분업 이후 10년 넘도록 정부의 강압에 시달려 왔는데 또 다시 물러서자, 더 좋은 기회를 엿보자고 하는 여러분의 주장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며 끝까지 설득에 나섰다.
하지만 의료계 지도자들의 의중을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노 회장은 '중재안'을 제시했다. 로드맵상의 단체행동 계획은 잠정 유보하되 '의협 회장 단식 투쟁'은 예정대로 시작하자는 것이었다. 투쟁을 갈망하는 회원들의 정서와 민초 회원들을 이끌어야 하는 의료계 지도자, 양쪽의 입장을 모두 헤아려야 하는 의협 회장으로서는 달리 선택의 길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노 회장의 고뇌...그리고 선택
이틀 뒤 노 회장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의협을 믿고 맡겨보자'는 신뢰를 얻기 위해 노력했으나 아직은 그 신뢰가 부족함을 절감한다"며 착잡한 심경을 토로했다.
회원들도 당황스런 분위기가 역력했다. 포괄수가제 강행에 이어 폭력적인 수가협상으로 침체에 빠져 있던 의료계가 연말 대선을 앞두고 대대적인 반격을 감행할 것이라 기대했던 민초 의사들은 낙담했다.
이 같은 분위기 속에 노 회장은 12일 홀로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단체 행동은 유보됐지만 투쟁의 불씨를 꺼뜨릴 순 없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노 회장은 자신의 단식투쟁을 "파도를 만들기 위한 몸부림"이라 표현했다. 노 회장은 이날 단식에 앞서 기자회견을 열고 "잠잠한 바다처럼 무기력하게 잠들어 있는 의료계가 깨어나, 의사들의 간절한 염원이 큰 파도를 일으킬 수 있기를 바란다"고 담담히 말했다.
대정부 투쟁에 모든 회원이 동참하기를 염원하는 마음으로 시작된 노 회장의 단식투쟁은 이미 적지 않은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분위기다. 인터넷 의사 커뮤니티에는 노 회장의 단식을 지지하며 투쟁 동참을 약속하는 회원들의 글이 잇따르고 있다.
한 회원은 "단식하는 의협 수장을 그대로 볼 수는 없어 투쟁에 참여한다"며 "이미 휴업 공고문도 붙였다"고 말했다. 또 다른 회원은 "작은 파도를 일으켜야 큰 파도가 일어나는 것"이라며 "자기 스스로 분명히 일어서야 한다고 동감한다면 투쟁을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부여 내과의'란 닉네임의 회원은 "위에서 시켜서 하는 투쟁이 아닌 밑에서 시작되는 투쟁을 해보자"며 동참을 독려하기도 했다. 인근 지역에 위치한 회원들끼리 서로 만나 서로를 격려하고 의견을 교환하자는 제안도 앞 다퉈 나오고 있다.
배수의 진 친 노회장, 약속 못지키면 떠나겠다
노 회장은 현재 단식을 견뎌낼 건강 상태가 아니다. 지난달 한 지역의사회 행사 참석 뒤 응급실에 실려 갈 정도로 의협회장 취임 이후 최악의 건강상태를 보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단식을 자처한 것은 정상적인 방법으론 타개할 수 없는 내부적 상황, 그리고 노 회장 스스로 말했듯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이라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노 회장은 이미 다리를 건너고 불살랐다. "(대정부 투쟁을 하겠다는) 회원들과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상황이 된다면 능력의 한계를 인정하고 떠나겠다"는 말에서 무거운 각오가 전해진다.
배수의 진을 친 노 회장과 의협의 투쟁 행보, 의료계 지도자들과 민초 회원들의 움직임에 정부와 정치권, 그리고 국민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