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법률 산책 ①
[의료법률 산책]은 의사 출신 제2호 변호사라는 이정표를 세운 김성수 파트너 변호사(법무법인 지평)와 지평 의료팀 변호사들이 돌아가며 집필하는 의료법률 전문칼럼입니다. 김성수 변호사는 1985년 서울의대 의학과 2학년 때 민주 개헌을 요구하는 시위에 가담한 혐의로 옥고를 치르면서 학업을 중단해야 했습니다. 1995년 37회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사법연수원(27기)을 마친 김 변호사는 서울의대의 복학 허용으로 2000년 의사면허를 취득할 수 있었습니다. 현재 노사관계·지적재산권·보건의료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의료법률 산책]에서는 한의사들의 현대 의료기기 사용의 법적 문제·암 오진시 의사의 책임·정신과 환자의 강제입원시 주의사항 등 의료행위와 관련된 의사의 법적 책임을 비롯해 제약·바이오산업과 관련된 법적 이슈도 다룰 예정입니다. |
수혈이 필요한 상황에서 환자가 미리 요청한 내용에 따라 수혈을 하지 않아 그 환자가 사망하게 된 경우에 의사는 업무상과실치사죄의 형사책임을 부담할까?
나아가 종교적인 이유로 미성년의 자녀에게 필요한 수혈을 거부한 부모는 그로 인해 자녀가 사망한 경우에 어떤 법적 책임을 져야할까?
대법원은 최근 환자가 인공고관절 치환술을 받는 과정에서 대량 출혈로 수혈이 필요했음에도, 환자의 사전 요청에 따라 수혈을 하지 않았던 의사에 대해 업무상과실치사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하급심 판결을 확정했다(검사 상고기각 판결 선고).
환자는 60대 여자인 '여호와의 증인' 신도로 다른 사람의 혈액을 제공 받지 않는 방식 즉 무수혈방식으로 수술 받기를 원했다. 환자는 여러 병원을 방문, 무수혈방식 수술이 가능한지 문의했으나 출혈의 위험성이 크다는 이유로 난색을 표명했다.
피고인은 모병원 정형외과 병원의사로 비록 대량 출혈의 위험이 예상되지만 환자의 간곡한 요구에 따라 무수혈방식의 수술을 적극적으로 검토, 환자를 입원하게 했다. 입원 직후 실시한 혈액검사에서 혈소판·헤모글로빈 수치는 정삼 범위 이내였으며, 혈액응고검사·소변검사·간기능검사에서도 특이 소견은 없었다.
병원내 혈액내과 등 타과 의사들과 협의를 한 결과에서도 무수혈방식 수술이 가능하다는 의견이 나왔다.
피고인은 수술에 앞서 상황에 따라 수혈을 하지 않으면 출혈로 인해 환자가 사망에 이를 위험성이 있음을 설명했다. 환자는 입원 전에 병원에 무수혈방식 치료를 요청하는 각서를 제출했다. 각서에는 전혈수혈이나 성분수혈의 금지를 명시했다.
나아가 "담당 의료진은 치료 도중 전혈이나 혈액성분의 수혈이 필요하다고 느낄지 모르지만, 그렇더라도 수혈을 원치 않는다는 본인의 의지는 확고하며, 설사 환자가 무의식이 되더라도 이 방침은 변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특히 환자는 "여호와의 증인 신분으로, 관련된 문제를 심사숙고한 후 본 의료적·종교적 각서를 작성하고, 이러한 방침을 따름으로 인해 야기되는 모든 피해에 대해 병원 및 담당 의료진에게 민·형사상의 어떠한 책임도 묻지 않겠다"고 기재함으로써 무수혈방식 고수로 인한 책임을 면제하는 취지를 명확히 표했다.
수술직전에 마취통증의학과 의사는 환자와 딸을 만나 수술 도중 대량 출혈 발생가능성이 있고, 이런 경우 수혈을 하지 않으면 장기손상 등으로 사망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수술 직전에도 환자는 수혈거부 의사를 재차 확인했다.
피고인은 무수혈방식으로 수술을 진행했으나 과다출혈로 범발성 혈액응고장애가 발생했다. 타가수혈을 하지 않으면 사망가능성이 높았다.
피고인은 수술장에 있던 다른 의사를 통해 대기실의 환자 가족들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환자 요청에 반해 타가수혈을 할지에 관한 최종 의견을 타진했다.
여호와의 증인을 신봉하던 배우자는 무수혈방식을 고수한 반면 자녀들은 타가수혈을 강력히 희망했으나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피고인은 수술을 중단하고 환자를 중환자실로 옮겼다. 환자의 배우자는 뒤늦게 타가수혈에 동의한다는 의견을 냈다.
그러나 당시 폐울혈 등이 나타났고, 타가수혈이 상태 악화를 초래할 가능성이 있어 진행하지 못하던 중에 환자는 사망했다.
분명히 환자는 거듭해서 무수혈방식 치료를 명확히 표시했다. 그런 의사표시의 배후에는 피를 섭취하지 말라는 성경 구절의 의미를 수혈금지로 받아들이는 여호와의 증인 교리가 있다. 환자는 자신의 종교적 신념에 따라 타인의 피가 자신의 몸에 들어오는 것을 거부했다.
다만 자가수혈이나 셀세이버(cell saver) 방식은 받아들였다.
종교적인 이유가 아니라도 타인의 혈액을 통해 에이즈나 간염 등에 감염되는 사건도 종종 발생하고 그로 인해서 혈액관리자가 법적 책임을 부담한 사례도 있다.
이런 사건들로 의료계 내에서는 무수혈방식을 고수하는 여호와의 증인에 대해 불합리한 신념이라고 매도하기 보다 수혈의 위험성을 최소화하는 대안적 치료방식을 모색하는 긍정적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생명은 유일하다는 점과 타가수혈로 죽음을 피할 수 있다는 점을 들어 본인의 사전 의사표시와 무관하게 응급상황에서는 수혈을 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환자의 가족들과 검사의 이같은 문제의식으로 의사는 피고인으로 기소를 당했다.
그러나 환자의 의사표시가 결코 우발적이거나 일시적으로 형성된 것이 아닌 점, 종교적 신념은 인간의 근원적 성찰의 산물이라는 점, 환자가 최소한 자살의 의도를 가진 것이라고는 볼 수 없는 점, 환자가 이미 여러 병원에서 무수혈방식 수술을 거부당했음에도 피고인을 찾아서 무수혈방식을 간곡히 요청한 점 등을 두루 고려하면 환자의 뜻을 존중한 의사에게 형사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심지어 이런 경우에 환자의 뜻에 반해 타가수혈을 강행하는 것이 오히려 위법하다는 주장도 있다.
한편, 법원은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이유로 수혈이 필요한 미성년 자녀에 대해 수혈 치료를 거부해 사망에 이르게 한 부모에게 자녀보호 의무 위반을 이유로 한 유기치사죄를 인정했다. 종교적 신념은 자신의 문제일 뿐 어린 자녀의 희생을 무릅쓰면서까지 함부로 적용할 수는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