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성원들의 공동체의식이 무너진 이유에 대해 어느 누구도 책임있는 답을 하지 못했다”, “사적인 편견으로 의료원 다수의 건전한 사기를 떨어뜨리는 행위는 간과하지 않을 것이다.”
지난 8일 경기도 양평에서 열린 한양의대 교수연수회에 참가한 김종량 한양대 총장은 연수회에 참가한 100여명의 교수들을 상대로 한양대의료원의 발전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이같이 밝혔다. 물론 “지친 식구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집다운 집을 만들겠다”거나 “올바른 의사결정을 위해 총장실을 늘 열어 둘 것”을 약속하는 등 구성원들의 사기진작책들이 언급되기도 했지만, 이날 김 총장의 말에는 교수연수회에 참석한 대학의 총책임자가 의례적으로 하는 축사와는 확연히 다른, 남다른 의지가 배어 있었다.
1972년 17개 진료과에 204병상을 갖추고 개원한 한양대의료원은 1939년 동아공과학원으로 시작한 한양대학교의 성장세와 맞물리며 순조로운 출발을 보였다. 개원당시 10만여명을 기록했던 연 외래환자수(초진·재진 포함)는 2000년 54만명으로 증가했으며 입원환자수도 연 5만명에 불과했던 1972년에 비해 2000년 현재 27만여명으로 증가했다. 병원의 규모역시 204병상으로 개원한 이래, 지속적인 병상 증설로 1979년 700병상에서 1992년 1,100병상까지 늘어났다가 2002년 현재는 970병상으로 축소된 상태다. 수치상으로 나타난 한양대의료원은 초기 개원이후 꾸준한 성장을 기록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의료원에 몸담고 있는 대다수의 교수들은 한양대의료원의 전성기는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중반이었으며 현재 의료원의 상황은 개원이래 최대의 위기라는 지적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런 지적들은 병원의 경영상태를 비교적 정확히 알 수 있다는 각종 경영 관련 수치에서도 드러난다.
2002년 3월 전국 주요종합병원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병상이용율을 살펴보면 한양대병원은 87.5%를 기록, 조사대상 11개 병원 중 10위를 차지했다. 2001년 4월에 조사한 병상회전율과 평균재원일수 항목으로 넘어가면 사태는 더욱 심각해 진다. 당시 삼성서울병원의 병상회전율이 3.08%로 조사대상 병원 중 1위를 차지했다. 한양대병원의 경우는 1.82%. 삼성서울병원에 비해 절반을 약간 넘는 수치다. 그러다 보니 평균 재원일수가 길어진다. 조사대상 병원 중 14.6일을 기록, 같은 조사에서 평균 재원일수가 가장 짧은 것으로 조사된 이대 목동병원의 8.82일에 비해 거의 2배나 긴 것으로 나타났다.
연도별 하루 평균 환자현황 역시 1992년 1,056명의 입원환자를 기록했던 것이 1995년 931명, 1998년 814명, 급기야 2000년에 이르러서 744명까지 떨어졌다. 사정이 이러다 보니 1992년 69%에 이르던 기본재산 비율이 2001년 25.7%로 현저히 하락했으며 이에 비해 부채비율은 1992년 44%이던 것이 2001년 7배나 늘어난 288%로 악화됐다.
그러나 한양대의료원의 진짜 위기를 말하는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경영상의 수치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의료원내에 만연한 문제들에 주목한다. 그들은 이제 서른살을 갓 넘긴 한양대의료원이 복지부동과 출신학교간 이기주의, 냉소주의라는 노인성 질환에 시달리고 있다는 지적이다.
지난 11월초 김종량 한양대 총장은 의료원내로 총장 집무실을 설치하는 파격적인 결정을 내렸다. 물론 1976년에서 1981년까지 김연준 당시 총장(현 재단이사장)이 4, 5, 6대 의료원장을 겸임한 선례가 있었지만 이번 의료원내 총장실 설치는 현 상황에 대한 위기의식의 공유와 문제제기의 의미가 강해 당시의 상황과는 확연히 다르다. 하지만 이런 결정에도 불구하고 총장의 의료원 정상화에 대한 의지가 구성원들의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우선 다시 반려된 보직사퇴서를 받아든 일부 보직자들의 뼈를 깍는 반성이 감지되지 않는다. 그저 다시 받아든 보직사퇴서를 면죄부 정도로 여기거나 몸조심을 하기 위해 급급한 분위기다. 그런가 하면 의료원의 몇몇 교수들은 이번 총장실 설치가 너무 성급한 결정이었다는 우려를 제기한다. 물론 그런 우려의 밑바탕에는 아무리 그래봤자 별로 나아질 것이 없다는 냉소주의가 깊게 깔려있다. 게다가 몇몇 중진급 교수들은 지난 8일 열린 교수연수회에 참가한 후 더욱 냉소적이 돼버렸다.
교수연수회에 총장이 참가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총장과의 허심탄회한 대화의 시간을 내심 기대했으나, 기대하지 않던 총장의 노래 몇곡만 들었을 뿐 기대했던 시간은 성사되지 못했다. 이와 관련해 이번 연수회를 준비한 의대 측은 어렵게 참석한 총장과 의대교수들간의 대화의 시간이 왜 프로그램화되지 못했는지 명확한 해명이 있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런 몇가지 실수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총장이 의료원으로 내려온 이후에도 오히려 구성원들이 복지부동 자세를 더욱 강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구성원 모두 불만은 많지만 내가 왜 쓸데없이 나서서 정을 맞아야 하나, 대충 이 시기를 넘겨보자하는 생각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는 분위기다.
김 총장 역시 지난 8일 교수연수회에서 언제나 누구에게나 총장실을 열어 두겠다고 밝혔지만 일반 교수들과 구성원들에게 총장실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은 박제된 낯선 공간일 뿐이다.
한양대병원과 한양대의료원의 위기가 구성원들 사이에 폭넓게 공유된 것은 꽤 오래전의 일이다. 혹 어떤 교수는 1986년 일어난 노조의 장기파업 이후 의료원이 급격히 조직의 탄력성을 잃어 버리며 쇠락의 길에 첫 발을 띤 것은 아닌가 지적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비관적인 현실은 곧 한양대의료원이 회생할 수 있는 절대절명의 기회이기도 하다는 의견에는 이의가 없다. 무엇보다 한양대 재단이 현상황을 타개해 보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인다는 점이 회생의 기회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구성원들의 희망을 부채질하고 있다. 한양대의료원의 생리상 그 어느 누구보다도 의료원에 막강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히든카드'가 총장이라는 사실에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는다. 상황에 따라 총장실 설치가 한양대의료원의 조직에 일대 바람을 불어 올 수도 있는 태풍의 핵임을 구성원 모두 인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 총장 스스로도 의료원에 내려왔다가 아무것도 이뤄내지 못하고 철수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와함께 중진급 교수들을 중심으로 김 총장에 대한 확고하고 폭넓은 지지층이 비교적 두텁게 있다는 점이다. 한양대의료원이나 재단에 대한 지지와는 별개로 중진교수들의 총장에 대한 기대와 믿음은 한양대의료원의 분위기를 냉소주의에서 포지티브적인 분위기로 전환할 수 있는 중요한 지렛대가 될 수 있기에 김 총장으로서는 그 활용에 대해 주의 깊게 고려해봐야 할 대목이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김 총장의 의지가 의료원의 체제를 바꿀만큼 강한 것이냐는 회의론도 만만치 않게 고개를 들고 있다. 사실 총장의 의료원 직무는 한시적인 상황이며 1∼2개월 후 적당히 상처입지 않는 상황에서 `명예로운 철군'이란 실리를 취할 것이 아니겠느냔 지적이다. 상당히 근거있는 전망인 동시에 김 총장으로서도 최선은 아니지만 차선으로 선택할 수 있는 매우 매력있는 방안이 될 가능성이 높다.
물론 차선책이 되기 위해서는 김 총장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냉철히 분석하고 실현 가능한 방안에 대한 단계별 목표를 명확히 해 이를 실행시켜 나가는 방법론이 관건이다. 하지만 이런 차선책 역시 포스트 총장체제 이후에 의료원에 대한 혁명적인 체제 변화가 전제되지 않는다면 의료원 정상화는 `100일 천하'에 머무를 공산이 크다.
김 총장 스스로가 인정하던, 그렇지 않던 현재 김 총장의 한발은 한양대의료원 정상화란 진흙탕에 빠져 있다. 그러나 많은 구성원들은 아직 김 총장이 의료원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야전사령관의 역할을 해 줄 수 있을까하는 생각에 반신반의하고 있어 쉽게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 결국 한양대의료원이 새로운 출발은 하기 위해서는 총장이 구성원들에게 확실한 의지와 믿음을 줘야 한다. 그들은 총장이 나머지 한 발도 다른 발과 마찬가지로 진흙탕에 확실히 담궈 주기를 원한다. 김 총장에게는 대단히 부담스런 일인 동시에 의료원을 살리기 위한 필수요소로 보여진다.
다시 한양대의료원은 다시 살아날 수 있을 것인가? 라는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결국 위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김 총장을 비롯한 2천5백 의료원 식구들에 대한 2가지 질문과 그에 대한 대답이 전제돼야 할 것 같다.
외면하고픈 현실을 받아들일 각오가 되었는지?
험난한 의료원 정상화의 길을 꿋꿋히 함께 걸어갈 용기와 의지를 갖고 있는지? 의료원 식구들의 대답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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