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패배자에게 돌아간 시세차익의 전리품
녹십자는 지난해 일동제약 지분의 29.36%를 확보해 일동제약의 지주회사 설립을 부결시키고 올해는 임기가 만료될 사외이사와 감사를 추천하면서 일동제약의 반발을 불러왔다. 주총결과 일동제약측이 추천한 사외이사와 감사가 선임되고 녹십자측이 추천을 거둬들이면서 승부는 싱겁게 마무리되는 듯 했다.
언론들은 녹십자의 완패 혹은 일동제약의 승리라고 보도했지만 이번 주총이 녹십자의 완패라고 보는 것은 너무 단선적인 평가.
이번 사외이사 선임 사태는 지난 달 모 신문가 보도하면서 수면 위로 떠올랐다. 보도 이후 일동제약은 즉각 반발했다. 녹십자가 적대적 M&A를 하기 위해 일동제약의 경영권 흔들기에 나섰다며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일동제약 경영진은 언론과 성명서 등을 통해 연일 녹십자의 선임 제안을 비난했다.
녹십자의 제안을 부결시키기 위해 우호지분 확보에 나서면서 적지않은 수고와 비용도 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일동제약 노조원들이 건보공단 앞에서 녹십자의 행태에 항의하는 집회도 벌였다.
일부 노조원은 녹십자 대표이사의 집앞에서 항의시위를 하기까지 했다. 한마디로 녹십자의 제안을 막기 위해 일동제약은 총력전을 펼친 것이다.
이에 대한 녹십자의 반응은 어땠을까?
조용했다. 그 흔한 성명서 한 번 발표하지 않았다. 일동제약이 연일 녹십자를 공격하던 모습과는 대조적이었다.
녹십자의 이런 대응은 20일 열린 주총까지 이어졌다. 녹십자는 일동제약측 사외이사·감사 후보 선임안에 대해 이렇다할 반대없이 받아들였다. 왜 녹십자는 적극적인 대응에 나서지 않았을까?
애초부터 녹십자는 이번 사외이사 선임전에서 반드시 이겨야겠다는 의도가 없었던 것 아니냐는 해석이다. 이런 해석에서 한 발 더 나아가면 이번 사외이사 선임전은 녹십자의 '의도된 패배'가 아니었느냐는 분석까지 가능하다.
시세차익 최대 2.5배에다 경영권 프리미엄까지
녹십자는 이번 사외이사 선임전에서 패한 듯 보이지만 적지않은 전리품을 획득했다.
우선 시세차익이 눈에 띈다. 녹십자가 일동제약 주식을 본격적으로 매입하기 시작한 것은 2012년. 당시 11월 기준 일동제약 주식은 1만원을 넘지 않은 9000원대 수준이었다. 일동제약 주식은 2012년 12월부터 급등세를 보이다가 지난해 2월 일동제약 지주회사 설립안이 상정된 주종 전후 1만7000원을 찍으면서 2배나 올랐다.
녹십자가 보유한 일동제약 주식은 746만주다. 지난해 2월 주총이 열리기 전 매집한 주식은 315만주다. 시점에 따라 정확한 측정은 어렵지만 증권가는 이미 녹십자가 수백억원의 시세차익을 올린 것으로 보고 있다.
일동제약 주식의 시세차익만 본 게 아니다. 일동제약 사외이사 선임 건이 논란이 된 직후 녹십자 주식도 9.76%나 오르면서 역대 가장 비싼 18만원대를 기록했다. 그깟(?) 사외이사 선임 정도 요구한 것치고는 양쪽에서 적지않은 시세차익을 거둔 것이다.
물론 녹십자의 주가 상승이 모두 일동제약 지분매입 덕이라고 볼 수만은 없지만 적지않은 영향을 미쳤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더구나 일동제약 사태는 현재 진행형이다. 앞으로 주가가 출렁일 가능성은 매우 크다. 주가가 출렁일 때마다 일동제약과 녹십자 주가 모두 오를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일동제약 주식처럼 경영권과 직결된 지분일 경우 앞으로 주식을 매각할 때 소위 '경영권 프리미엄'을 얹어 받기도 한다.
최근 포스코가 성진지오텍이라는 회사를 인수합병하면서 오너 지분 430만주를 시세보다 2배나 비싸게 산 게 대표적인 사례다. 녹십자가 앞으로 일동제약의 주식을 팔고 나온다면 시세차익에 경영권 프리미엄까지 얻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녹십자는 국내 제약계 가운데 주식매매 등을 통해 이득을 본 경험이 많은 소위 '선수'로 통한다.
2000년 녹십자는 주식시장에 뛰어들어 ㈜마크로젠 주식 51만1150주를 처분하고 212억원의 시세차익을 올렸다. 2003년에는 경남제약 지분 70%를 인수했다가 245억원에 지분을 매각하며 35억원의 시세차익을 거뒀다.
대표적인 성과로는 대신생명 인수건이 꼽힌다. 2003년 1600억원 들여 대신생명을 인수한 후 8년만에 2283억원에 대신생명을 현대차그룹에 매각했다. 이 과정에서 700억원 가까운 시세차익을 냈다. 녹십자는 지난 2001년부터 2013년 중 9년간이나 영업이익보다 더 많은 지분·투자 이익을 내기도 했다.
이쪽 분야에서는 국내 제약사 가운데 녹십자를 따라올 만한 제약사가 없다는 말이다.
지난 십여년 동안 인수합병을 통해 '산전수전' 다겪은 녹십자가 일동제약의 공격에 이렇다할 대응도 못해보고 깨졌다고 보는 것은 너무 순진한 해석이다.
녹십자는 일동제약 주총에서 패한 후 언론을 통해 "주주의 뜻을 존중한다. 일동제약의 2대 주주로서 경영 건전성 극대화를 위한 권리 행사에 지속적으로 매진하겠다"고 밝혔다. 2대 주주로서 원칙적인 권한을 넘지 않는 선에서 이번 전투의 범위를 조율한 듯 냉정하고 차분해 보인다.
고난의 패배 명분 쌓여 안정적인 퇴로 '일단' 확보
녹십자는 함께 협력해 주주가치를 높이고 경영 건전성도 극대화하려 했지만 일동제약이 이렇게까지 싫다하니 일부 혹은 전부 주식을 매각하고 나올 수밖에 없지않느냐는 명분있는 퇴로가 확보되고 있다.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녹십자가 적지않은 시세차익을 챙겨 나올 때 혹시 있을 수 있는 '먹튀' 여론은 녹십자가 패하는 모양새로 희석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그럼 녹십자의 목표는 도덕적인 비난없는 시세차익일까? 이번 일동제약 주식인수전에는 다양한 녹십자의 포석이 깔려 있어 보인다.
혹자가 얘기하는 적대적 M&A나 시세차익은 여러 포석 중 하나일 것으로 추정된다. 녹십자가 추가해 가져갈 만한 것들이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
과연 녹십자가 목표하는 플랜A는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