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호경 중재원장, 퇴임하면서 당부..."초대 원장, 숙명 같은 길 이었다"
"조정개시율 증가하고 성립도도 높게 유지...의료계와 갈등 없다" 강조
지난 2012년 4월 9일 초대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장(이하 조정중재원)에 취임한 추호경 원장이 우여곡절이 많았던 3년간의 임기를 마치고 조정중재원을 떠나면서 남긴, 퇴임의 변이다.
오는 8일 퇴임을 앞둔 추호경 원장은 지난달 31일 서울 중구 모 음식점에서 퇴임 기자회견을 갖고, 그동안의 소회와 향후 조정중재원의 역할과 운영방향 그리고 후임 원장에 대한 당부 사항 등을 밝혔다.
추 원장은 먼저 초대 조정중재원장으로 취임하던 때를 회상하면서 자신이 초대 조정중재원장을 맡게된 것이 숙명과도 같다고 말했다.
추 원장은 검사와 변호사를 거친 법조인으로 검사 초임 시절부터 보건의료 사건을 전담하면서 의료계와 인연을 맺었다.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사법고시에 합격해 검사 임용을 받은 추 원장은 법학대학원을 가려던 본래의 목표를 보건의료 사건을 담당하면서 바꿔, 서울대 보건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추 원장은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입법심의관과 법무부 법무심의관을 거치면서 1988년 처음 발의된 '의료사고 피해구제 및 조정에 관한 법(의료분쟁조정법의 전신)'을 심의하기도 했다.
이후 대한의료법학회와 대한보건협회 등 의료 관련 단체들에서도 활동했으며, 사법연수원 교수 시절에는 예비 법조인들에게 '의료과오 손해배상'을 가르치기도 했다.
추 원장은 "이러한 모든 의료계와의 인연이 자신이 초대 조정중재원장이 될 수밖에 없는 숙명이었을지도 모른다고 회고했다. 그리고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초대 조정중재원장으로서 조정중재원의 역할과 운영방향을 정립하기 위해 노력했고, 무엇보다도 환자와 의사 사이에서 중립적이고 합리적인 태도를 취해, 환자와 의사들의 신뢰를 얻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고 회고했다.
[이하는 추호경 원장과의 일문일답]
Q. 초대 조정중재원장으로 활동한 지난 3년의 소회는.
=힘들었지만 참으로 보람된 기간이었다. 어찌 보면 내 삶의 큰 줄기가 조정중재원 초대 원장으로 모두 집약되는 것 같다. 나는 초임 검사 시절부터 보건의료 사건을 전담했고 그 후로도 오랫동안 의료계와 인연을 맺어왔다. 그러한 모든 경험은 하늘이 나에게 초대 조정중재원장으로서 준비시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초대 조정중재원장이 나의 숙명이었던 것 같다.
Q. 취임 초기 환자들의 기대와 의사들의 반발로 조정중재원이 자리 잡기가 쉽지 않았는데.
=사실 취임 초기에는 속된 말로 '맨땅에 헤딩'하는 기분이 들었고, 각종 규정과 업무 매뉴얼 등을 만들면서 과연 이 제도가 잘 시행될 것인가 걱정도 많았다. 상임위원들과 직원들이 사명감을 가지고 열심히 해줘 생각보다 빨리 안착이 됐다. 지난해에 처음 받은 기관경영평가에서 A등급을 받은 것도 큰 보람 중의 하나인데, 그 후 직원들의 사기가 크게 올라갔고 더욱 열심히 하고 있다.
Q. 환자와 의료기관의 분쟁조정 참여율이 설립 취지에 비해 저조하다는 지적이 끊이질 않고 있는데.
=먼저 조정절차 개시에 피신청인의 동의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법 제27조 제8항은 매우 이례적인 입법례로서 잘못된 조항이다. 그리고 초기에 일부 의료인단체에서는 조정중재원의 조정절차에 절대 참여하지 말라고 공문을 발송하고 회원들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사실 좀 당황스럽더라. 그러나 다행히 지난 2012년에는 38.6%에 불과했던 조정개시율이 점차 상승해 올해는 48.9%에 이르렀으며, 조정성립률도 90% 대를 유지하고 있다. 의료인들도 차차 우리의 진정성을 이해해주는 것 같다. 다만 시간과 비용이 크게 절약되고 의료사고 관계자들의 응어리를 풀어주는 등 장점이 있는 이 제도를 두고 아직도 많은 의사들이 형사 피의자로나 민사소송의 피고로 시달리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Q. 의료계와의 소통을 지속적으로 강조했음에도, 의료계의 조정중재원에 대한 불신이 좀처럼 개선되지 않고 있는데.
=분명히 말하지만, 의료계가 조정중재원을 불신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어려운 처지를 호소하는 과정에서 조정중재원을 거명하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의료분쟁조정법은 조정사건 대리인 범위의 제한, 방문현지조사의 요건 및 절차, 조사 기피?방해 등에 대한 벌칙조항, 감정서 및 조정절차 진술의 원용 금지 규정 미비 등의 문제가 있다. 조정중재원에서도 개정해야 한다고 적극적으로 의견을 냈다. 실제로 그 운영도 전향적으로 하고 있어, 아직까지 이 조항들 때문에 의료계가 불편해하는 사례는 특별히 생기지 않았다.
소통은 참으로 중요한 가치다. 조정중재원의 핵심가치도 '공정, 신속, 소통'이다. 그동안 여러 네트워크를 활용, 서울과 지방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많은 의료인들을 만나 의료 현장의 목소리를 직접 들었고, 의료분쟁조정제도를 제대로 이해시키려고 노력했다. 또한 상임위원을 비롯한 모든 직원들은 감정과 조정 절차를 통해 환자와 의료인 간에 신뢰가 향상되도록 애쓰고 있다. 이러한 노력에 대한 결과로 조정참여율이 50% 가까이 상승하고 90% 선의 조정성립률을 유지하고 있다.
Q. 불가항력 의료사고를 둘러싼 갈등이 여전하다. 해결책이 뭐라고 생각하나.
=현재 불가항력 의료사고 보상재원 분담금은 3분의 2 정도가 납부됐다. 그리고 산과 분만사고로 인한 사건의 조정참여율이 61.5%로서 여타 진료영역에 비해 가장 높고(평균 45.7%), 조정성립률도 94.6%나 돼 매우 조정이 잘 이뤄지고 있다. 이런 수치로 볼 때 조정중재원과 산부인과 개원의 사이에 갈등이 있다고 보는 건 좀 무리라고 생각한다. 제도에 대한 불만이 있으면서도 의료계가 이렇게 협조해준 것에 대해 감사드린다.
그러나 불가항력 의료사고 보상제도에 대한 반감은 크게 남아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 제도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대로 불가항력 의료사고 보상제도가 산부인과 의사들을 옥죄고 진료의욕을 꺾는 것이라면 가장 빠른 해결책은 그 제도 자체를 없애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제도가 '환자 측의 물리적 실력 행사'를 막는 데 매우 유용한 제도이고, 또 그 제도 이용 사례가 늘어나면서 실효성도 상당하다는 것이 입증되고 있어, 없애기는 아깝다.
물론 현행 제도에 대한 법의 규정 형식과 제도 운영을 국가나 조정중재원이 맡도록 규정돼 있는 것은 입법론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분만의료기관들의 협의체에서 자율적으로 보상기금을 형성하면 그 액수의 2배 또는 3배 식으로 국고 보조를 해주어 산부인과 의사들 스스로 그 기금을 운영하도록 하는 것이 올바른 방식이라고 본다. 그렇게 한다면 거부감도 없을 뿐만 아니라 위헌 논란이 생길 여지가 없다.
Q. 퇴임하면서 의료계에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조정중쟁원을 이용했던 의료인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 그들은 조정 과정에서 진지하게 조정위원·심사관의 말을 경청했고 또한 환자 측을 이해하려고 노력했으며, 때로는 큰 양보도 아끼지 않았다. 다만 의료계가 전문 분야, 의료기관이나 근무 형태, 세대, 출신대학 등등의 각 분파를 뛰어넘어 대승적으로 단합된 모습을 보여야 할 것이다.
일부 의료계 지도자들의 사고가 너무나 경직돼 있는 것도 우려된다. 어느 조직이건 그 지도층 인사는 그 조직 구성원에게 실질적으로 이익이 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정확히 알고 그쪽으로 이끌어야 하는데 의료계는 그렇지 않은 것 같아 매우 안타까웠다. 내가 도울 수 있는 기회도 꽤 있었는데, 결국은 별로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임기를 마치게 돼 참으로 아쉽다.
Q. 향후 조정중재원의 발전 방향과 후임자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조정중재원은 준사법기관이다. 그러나 옳고 그름만 정확히 판단한다고 해서 그 소임을 다 했다고 할 수 없다. 법원이 '사법적 정의(judicial justice)'를 구현하는 곳이라면 조정중재원은 거기서 더 나아가 '회복적 정의(restorative justice)'까지 실현하는 치유적 사법기관이라고 할 수 있다. 환자 측과 의료인 측 모두를 따뜻하게 보듬어 의료분쟁으로 받은 상처를 깨끗이 낫게 해야 한다.
그동안 의료감정이 의료계 쪽으로 편향됐던 것도 의료분쟁이 격화됐었던 이유 중의 하나였는데, 앞으로 조정중재원 감정단의 전문성과 공정성을 잘 살려 수탁감정 등을 더욱 활발히 함으로써 환자 측과 의료인 측 모두가 신뢰하는 최고의 의료감정기관으로 발돋움해야 할 것이다. 또한 사후적인 분쟁 해결에만 그칠 것이 아니라 감정과 조정 사례들을 축적하고 관련 연구와 교육을 통해 여러 의료기관에서 의료사고를 사전에 예방할 수 있도록 그 선도적 역할을 해야 한다고 본다. 후임 원장은 높은 경륜과 균형 잡힌 의료관을 가지고 계신 분이 오셔서 여러 모로 다 잘 하실 것으로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