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가족들 '애도' 시작도 못한 채 '분노' 단계...사회정의 바로 세워야
대한정신건강재단, '한국트라우마스트레스학회' 추진
세월호 사고 1주기를 맞이했지만 생존자와 유가족들은 아직 애도조차 시작하지 못했으며, 마음 속 분노를 제대로 표현하지도 못하고 있다는 진단이 나왔다.
17일 세월호 사고 1주기를 맞아 대한정신건강재단 재난정신건강위원회 주최로 가톨릭의대 마리아홀에서 열린 '재난과 정신건강 국제 컨퍼런스'에서 유가족 자조 모임을 진행하고 있는 이강욱 강원대 의학전문대학원 교수(강원도광역건강증진센터장)는 '유가족과 함께 가는 길' 주제 강연을 통해 상실과 죄책감을 비롯해 분노와 우울 등 심리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유가족들의 상황을 전했다.
이 교수는 "대부분 유가족들이 생계를 중단하고, 서명운동과 집회·단식·재판 등에 참여하느라 여전히 분노 단계에 머물러 있다"면서 "잃어버린 희망이 아닌, 다시 찾고 싶은 희망을 위해 나선 유가족들에 대해 더 많은 관심과 이해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국제 컨퍼런스를 주최한 채정호 대한정신건강재단 재난정신건강위원회 위원장(가톨릭의대 교수·서울성모병원 정신건강의학과)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유가족들에게 절대로 잊지 않겠다고 한 약속을 지키고, 슬픔과 분노의 힘을 앞으로 있을 재난을 예방하고, 피해를 줄일 수 있도록 역량을 키우는 일"이라며 "이번 재난과 정신건강 컨퍼런스는 세월호 사고 이후 1년 동안 생존자와 유가족을 위해 펼쳐온 활동을 점검하고, 각 직역의 역할을 검토함으로써 재난을 예방하고, 재난에 제대로 대처하기 위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밝혔다.
이번 컨퍼런스는 보건복지부와 국민안전처의 후원으로 국제트라우마스트레스연구회(International Society for Traumatic Stress Studies, ISTSS)·국립서울병원·대한소아청소년정신의학회·대한신경정신의학회·안산온마신센터·집다트라우마연구소·한국심리학회 등이 함께 열었다.
컨퍼런스에는 세월호 사고 이후 생존자와 유가족은 물론 안산지역 주민의 정신건강 증진에 힘을 보태고 있는 강정훈(안산온마음센터 정신건강의학과)·김은지 단원고 스쿨닥터·이강욱 강원대 의전원 교수(정신건강의학과)·안현의 이화여대 교수(심리학과)·김정진 나사렛대 교수(사회복지학과) 등이 주제발표를 통해 그동안의 활동을 되돌아보고, 앞으로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인가를 모색했다.
이와 함께 요시하루 킴 일본 국티정신·신경의료연구센터장이 동일본 쓰나미 사태 이후 트라우마와 애도 문제를, 크리스티앙 찬 홍콩대 교수(정신과)가 태풍 이후의 심리 및 지역 사회의 공동 대응에 대해, 미란다 올프 국제트라우마스트레스학회장이 말레이항공 우크라이나 비행기 추락 사고 이후의 네덜란드의 대처 경험을, 그레테 교수(노르웨이 오슬로대학)가 2011년 노르웨이 테러사건 이후의 정신건강 대처에 대해 소개했다.
안현의 이화여대 교수(심리학과)는 '재난급성기에 어떻게 대처하는가' 주제발표를 통해 "세월호 사고 발생의 원인에 대한 진상 규명이 1주기까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유가족이 거리에서 투쟁하는 과정에서 작은 트라우마가 계속 되면서 PTSD가 만성화·지속화 되면서 외국의 경험이나 기존 사례과는 달리 변형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유가족뿐만 아니라 정신건강 전문가들도 힘이 소진되고 있는 상황"이라며 "전문가들의 상담과 치료도 중요하지만 진상 규명을 통한 사회정의가 먼저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안 교수는 "직접적인 피해자와 가족 이외에 잠수사나 구조자에 대한 정신상담과 치료 서비스는 지원이 되지 않고 있다"며 "더 나가가 지역사회와 지역주민에 대해서도 개입할 필요성이 있다"고 조언했다.
특히 PTSD에 시달리는 트라우마 경험자들을 가장 가까이에서 상담하고 지지하는 지역사회 정신건강 전문가들이 적극적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교육과 전문성을 강화하기 위한 공동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에도 의견을 함께했다.
이들 전문가들은 9·11 테러 유가족들의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 치료가 10년 이상 지속됐듯이 장기적인 치료와 지원 대책이 세월호 특별법 시행령에 담겨야 한다고 밝혔다.
세월호 의료지원금은 2016년 3월 28일까지 발생한 비용으로 한정하고 있다. 배상금을 지급받거나 다른 법령에 의해 의료비를 지원받은 경우에는 비용을 제외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대한신경정신의학회는 "피해자들의 안정적이고 장기적인 심리치료를 위한 '국립트라우마센터' 설립이 무산되고, 안산정신건강트라우마센터와 정신보건센터를 통해 심리적 증상과 정신질환 등의 검사와 치료를 지원하고 있지만 5년(2020년 3월 28일)까지만 가능하다"면서 "이마저 배상금에 정신질환 등의 진단 및 치료비가 포함된 경우 중복지원을 받을 수 없도록 제한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컨퍼런스에 참여한 한 신경정신과 전문의는 "아무런 생각없이 내뱉는 망언이나 조롱은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트라우마 피해자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한 번 더 주는 2차적인 피해를 준다"며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사회,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라는 민주적인 시민인식을 갖춰야만 이같은 재난 발생을 예방할 수 있고, 재난이 일어나더라도 제대로 치유할 수 있는 힘을 갖추게 된다"고 말했다.
채 위원장은 "이번 컨퍼런스를 계기로 재난으로 인한 트라우마 피해자들을 장기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의학 뿐 아니라 심리·사회복지·간호·시민사회 등 관련 직역이 모두 참여하는 한국트라우마스트레스학회를 11월 중에 출범키로 했다"면서 "안전하고 건강한 사회를 위해 제대로 탈바꿈을 해야만 더 큰 PTSD를 막고, 한 단계 긍정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