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진(서울 금천·명이비인후과의원/전 의료윤리연구회장)
BC 5세기부터 전해지는 히포크라테스 선서에 '나는 어떤 여성에게도 낙태용 페서리를 주지 않겠습니다'라는 구절이 있다. 고대시대에도 낙태가 성행했던 것 같다. 의과학의 발달과 의식의 변화 등으로 많은 피임법들이 개발되고 있다.
현재 사용되는 응급피임약은 콘돔이 찢어졌다든지, 또는 강간 등에 의한 원치않는 임신을 방지하기 위한 사용하는 약이다. 성공률은 약 75%정도로 확실한 기대를 할 수 없지만 말 그대로 응급상황에서 사용하는 방법이다.
영어로 Emergency contraceptive는 '응급피임약'으로 번역돼야 하는데 우리나라에는 언제부터인지 '사후피임약'으로 번역해 사용하고 있어 이 약제에 대한 개념과 사용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지금이라도 응급 피임약으로 불러야 할 것이다.
최근 응급피임약을 전문의약품에서 일반의약품으로 전환하려는 시도가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모든 의료행위나 약물사용에는 윤리적인 문제와 그 후에 발생할 수 있는 상황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준비돼 있어야 한다.
피임도 처해진 여건에 적합한 방법을 택할 때 부작용을 줄일 수 있고 낙태를 줄일 수 있다. 그렇지 않은 경우 바라지 않는 나쁜 결과들이 우리에게 짐으로 다가올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응급 피임약을 쉽게 구입해서 사용할 수 있는 환경이 됐을 때 발생할 수 있는 문제들을 살펴보자.
먼저 응급피임약을 복용 후 발생하는 부작용에 대한 문제다. 약제 복용 후 100명을 기준으로 31명이 비정상적인 자궁출혈, 14명에서 토할 것 같은 멀미증상과 복통·무기력증, 10명에서 어지럼증과 두통, 8명에서 유방통증, 5명에서 생리 지연 등의 증세를 호소했다. 하지만 이런 증상이 단독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복합적으로 발생하는 것이기에 실제로 여성들이 겪는 고통과 불쾌감·불안감 등은 상당한 수준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부작용보다 더 심한 부작용이 있는데도 잘 알려지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둘째, 미성년자들의 보호문제이다. 일반의약품으로 전환 시 미성년자들이 응급 피임약을 구입해 무분별하게 사용할 가능성이 염려된다. 현재 미성년자에게 판매가 금지된 담배와 술을 청소년들이 너무나 쉽게 구입할 수 있다. 청소년에 대한 술·담배의 접근도 막아내지 못하는 취약한 사회 구조를 가진 상태다.
이런 상황에서 응급 피임약의 일반의약품 전환은 청소년들을 불건전한 성문화에 노출시킬 수 있다. 2010년 영국보고서에 따르면 응급피임약을 청소년들에게 무료로 공급한 이후 성병과 임신이 더욱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셋째, 남성의 책임은 저하되고 여성은 사회적 약자로 전락할 수 있다. 성관계 후 남성들이 여성들에게 응급 피임법을 강요해 남성은 피임에 대한 방관자로 행동하고 여성에게만 모든 책임을 미룰 가능성이 많다.
또한 응급 피임약을 기대하고 콘돔사용을 기피하면서 여성이 성병 등 각종 질병에 노출될 가능성이 현저히 높아질 것이다.
넷째로 개인 성윤리 의식의 저하 현상과 맞물려 발생할 사회적 성윤리의 타락 현상이다. 성의 혁명으로 알려진 프랑스 68혁명과 히피문화를 타고 프리섹스가 광풍처럼 유행할 때, 낙태와 미혼모 발생을 막자고 미혼자들에게 피임을 허용했다.
하지만 사회적 합의나 제도적 안전장치 없이 시행된 이런 정책은 성윤리의 타락과 미혼모의 폭발적인 증가라는 역풍을 가져왔다. 개인의 자율성은 존중돼야 하지만 자기결정권을 잘못 사용하게 되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사회적 윤리 타락현상을 초래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정부의 윤리의식의 저하문제이다. 처음 응급의약품 도입부터 현재까지 의혹스러운 행동들과 많은 문제점이 있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일반약으로 전환하려고 시도하는 정부의 입장을 이해할 수 없다. 혹 제약업계의 입김이 작용하는 것은 아닌가하는 의심까지 든다. 국민을 상대로 악행을 하려는 것인가?
응급 피임약의 일반의약품 전환은 마지막 안전장치를 포기하는 행위이고, 국민의 건강과 생명을 위협하는 흉기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미숙한 정책결정은 미끄러운 경사 길처럼 개인과 사회에 돌이킬 수 없는 큰 짐으로 남을 수 있다는 역사적 교훈을 잊어서는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