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약회사 CEO 릴레이 인터뷰 ②] 허은철 녹십자 대표이사 사장
'비장(悲壯)', 사전적 의미로는 '슬프면서도 씩씩하고 장한 상태'.
허은철 녹십자 사장은 인터뷰를 통해 "비장하다"고 말했다. 비교적 경쟁이 덜한 국내 '백신'·'혈액제제' 분야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지난해 경영성과 역시 좋았던 녹십자와 허은철 사장은 왜 이렇게까지 비장한 걸까?
지난해 취임한 이후부터 허은철 사장은 녹십자의 미래를 건 한판을 시작했다고 인식하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특히 앞으로 몇년 이내에 그 한판의 승부처 혹은 분수령이 올 것으로 보고 있는 듯 하다. 그의 각오가 비장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녹십자가 가고자하는 방향은 다른 국내 제약사와 다르지 않다. 글로벌화다.
녹십자의 고민이 이렇듯 깊은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국내 제약사 가운데 글로벌화에 가까이 다가간 제약사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가장 가까이 갔기 때문에 손만 뻗으면 닿을 듯도 하지만 쉽게 잡히지 않는다는 현실감도 생생하다.
녹십자의 글로벌화 모델은 최근 연이은 기술수출로 주목받고 있는 한미약품과는 다르다. 녹십자는 신약후보물질을 찾아내 유력 다국적 제약사에게 후반기 임상시험과 마케팅 등을 넘기고 로얄티와 계약료를 챙기는 '기술수출(라이세싱 아웃)'하는 방식보다 완제품 수출이나 현지 공장건립을 추진하는 방법을 택했다.
지난해 6월 캐나다 퀘벡에 연간 100만리터 혈장을 분획해 아이비글로불린(IVIG)·알부민 등의 혈액제제를 생산하는 공장 건설에 들어갔다. 캐나다 공장 건설에만 약 1870억원이 투자된다.
유전자재조합의약품 미국 수출을 위해 올 상반기 녹십자는 충북 오창공장 실사를 미국 FDA로부터 받는다. 모두 북미 진출을 겨냥한 포석이며 글로벌 녹십자를 향한 사실상의 첫 단추다. 두 가지 프로젝트의 성공여부에 글로벌 녹십자의 미래가 걸린 셈이다.
글로벌 녹십자가 되기 위해 놓아야 할 것도 있다. 안정적인 국내용 아이템을 정리해 글로벌화에 집중하는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한다.
안정적인 국내 시장을 버리고 굳이 불확실한 글로벌 시장 진출을 할 필요가 있겠느냐고 우문을 던져봤다. 허은철 사장은 "미국 시장에 진출하지 않고 글로벌 제약사가 된 예는 없다. 국내 시장만으로는 의미가 없다. 가야할 길이라고 생각한다"고 대답했다.
<일문일답>
캐나다 공장 설립과 FDA 오창공장 실사가 주목받고 있다.
두 가지 일로 바쁘다. 녹십자 글로벌화에 중요한 키가 될 것이다. 시험을 치르는 것이라 부담이 많다. 혈액제제 북미진출이 처음인 만큼 어렵지만 이번에 길을 닦아 놓으면 앞으로 훨씬 수월할 것이다. 그만큼 처음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녹십자의 강점인 유전자재조합제제 역시 좋은 성과낼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독감백신 역시 남미와 중동 수출성적이 좋다. 매해 20% 이상 매출을 늘리면서 녹십자의 성장을 이끌어 왔다. 물론 만망한 시장이 아니다. 중국과 인도 시장 등이 점점 치열해지고 있다. 현지합자나 액원수출 현지분주 등을 통해 난관을 돌파하고 있다. 결국 미국 시장을 가야 한다.
올해 한미약품의 기술수출이 화제였다.
한미약품의 선전에 자극받아 녹십자 역시 신약개발을 어떻게 할 것인지 논의하고 있다. R&D 투자규모를 지난해 대비 32%나 늘렸다. 엄청나게 증액했다. 사실 녹십자는 백신이나 혈액제제 말고도 좋은 파이프라인 있고 나름대로 준비도 꾸준히 했다.
한미약품이 대략 2000년 초반부터 투자를 시작했다면 녹십자는 그보다 조금 늦은 2004년부터 R&D 투자를 확대했다. 물론 한미약품만큼 전폭적인 투자는 하지 못했다. 혈액제제와 독감백신에 힘을 기울이다보니 신약개발까지 나서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녹십자도 기대하고 있는 아이템이 있다. 아이템이 성과를 내면 분위기 달라질 거다. 특히 항체 항암제 임상결과가 좋아 기대하고 있다.
혈액제제 분야에서 국내 최고인 녹십자의 글로벌 순위는 어느 정도로 보나?
혈액제제 분야는 비교적 경쟁이 덜하다. 대략 글로벌 플레이어는 10개 정도로 본다. 나머지는 로컬 제약사다. 혈장분획 능력으로 보자면 녹십자는 10곳 중 말단이다. 실사예정인 오창공장과 캐나다·중국 공장 생산량을 향후 다합치면 2019년쯤은 다섯 손가락 안에 들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순위를 뒤엎기 위해서는 미국 시장에 가야 한다. 미국 시장에 들어가지 않고 글로벌 제약사가 된 곳은 한 곳도 없다.
백신은 혈액제제 분야보다 '빅파마'가 더 많다. 녹십자는 여건상 선택과 집중을 할 계획이다. 인플루엔자 백신 등 몇개 백신에 집중해 글로벌 제품을 만들어낼 거다. 국내 시장만으로는 의미가 없다. 백신 글로벌화에 나설 계획이다. 이제 시작이다. 국내 허가는 의미가 없다. 선진국 허가문턱을 넘어야 한다. 백신의 특성상 생산과 관련된 모든 걸 뜯어 고쳐야 한다. 일반 제제를 생산하는 것과는 다르다.
호주의 혈액제제 전문 기업 CSL을 성장모델로 언급한 것으로 안다.
선진 시장가기 위해 가능한한 모든 방안을 다 끄집어 내야 한다. 직접 생산해 들어가는 방법도 있고 라이센싱 아웃하는 방안도 있다. 그중 M&A를 하는 방법도 좋은 안이다. CSL은 호주에서 원액을 생산해 완제품 형태로 미국진출을 하려 했지만 쉽지 않자 미국 라이센셍이 가능한 유럽 회사를 인수해 우회로 들어갔다.
다양한 방식을 통해 목표를 이뤄야 한다. CSL은 지난 10년간 'ZLB'와 '아벤티스 베링' 등을 인수해 단숨에 500만 리터 이상의 혈장분획 능력을 갖춘 글로벌 1위 기업으로 부상했다. 여러 면에서 녹십자가 성장모델로 삼을 만한 기업이라고 본다.
글로벌 진출을 도모하는 사이 다른 제약사로부터 국내 시장을 잠식당하고 있지 않나.
플루백신의 경우 지난 시즌 성과가 좋았다. 국내 제약사가 백신을 출시하면서 경쟁이 치열한 것은 사실이지만 선발업체로 경쟁력이 있고 시장도 잘 수성하고 있다고 본다. 백신은 출시만 한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계속 추가임상 자료를 확보해야 시장을 지킬 수 있다.
그런 면에서 경쟁사보다 한 발 앞서 가고 있다고 자신한다. 혈액제제도 마찬가지다. 미국에서 출시하는 제품은 한국에서 출시한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몇몇 국내 제약사들이 국내 시장부터 녹십자의 성장모델을 좇아하고 있지만 시기상 늦었다고 본다. 글로벌 시장에서는 녹십자가 겨우 타이밍을 맞출 것이다. 막차다. 우리 뒤에 (글로벌 시장을) 들어오려하겠지만 턱도 없을 거다.
선택과 집중을 하자면 국내 처방약 시장에 대한 지원은 약해질 수밖에 없지 않나?
고민이다. 백신과 혈액제제말고도 합성 신약 중 좋은 후보 물질을 갖고 있지만 모든 분야에 투자할 수는 없다. 그래서 다른 제약사와의 다양한 제휴와 협업, 라이센싱 아웃 등을 모색하고 있다. 물론 국내 시장의 수익성은 점점 박해지고 있지만 하기 나름이다. 고수익은 아니지만 캐쉬카우로 (국내 출시 처방약을) 충분히 키울만 하다고 판단하고 움직일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