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종일 지음/자유아카데미 펴냄/1만 8000원
'기생(寄生)'은 분명 부정적인 말이지만 세상살이 측면에서 보면 그다지 나쁜 것만은 아니다. 작지만 어떤 도움으로 누군가 생명을 이어갈 수 있다면…. '더불어'라고는 말할 수 없겠으나 삶을 나누는 의미는 부여할만 하다.
사람에 감염되면 영양분을 빼앗고 소화불량이나 각종 염증-드물게는 암-을 일으키는 기생충. 분명 '기생'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행태는 나쁜 짓 투성이다. 그러나 기생충 중에는 인간의 삶에 도움이 되고 이용가치가 있는 것들도 많이 있다.
최근들어서는 기생충을 이용해 다른 질병 치료에 응용하는 시대가 열렸다. 적이면서도 친구가 될 수 있는 기생충에 대한 편견은 없었을까. 편견 역시 우리 머릿속에서 '기생'하는 나쁜 종자다.
채종일 한국건강관리협회장(서울의대 교수·기생충학교실)이 <우리 몸의 기생충 적인가 친구인가>를 펴냈다.
40∼50대 연령층부터는 기억속에 어린시절 '채변봉투'와 얽힌 한 두가지의 추억이 있다. 회충·편충·구충(십이지장충)…. 누구나 이 정도의 이름은 알 던 시대가 있었다. '기생충 왕국'으로 불리던 1945∼1970년대 전 국민의 기생충 감염률은 60∼90%에 달했고, 한 사람이 두 가지 이상의 기생충을 가진 경우도 많아 누적감염률은 120∼130%에 이르렀다. 기생충 감염을 막기 위한 지속적인 노력과 보건교육 덕택에 한국은 '성공적 퇴치'라는 결과를 얻었지만 이와함께 몇 가지 편견도 생겨났다.
먼저 회충·편충·구충 등이 기생충의 전부라는 오해다. 대부분 아메바·편모충·말라리아원충·와포자충 등의 원충들이 기생충 종류의 하나라는 사실을 알 지 못하고,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간흡충·장흡충·고래회충·개회충·고양이회충·선모충·동해긴촌충 등에 대한 인식도 부족하다.
또 기생충이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라는 착각 속에 무조건 퇴치해야만 하는 해로운 존재로 생각하고, 기생충과 숙주의 다양한 상호관계에 대한 이해와 생물체 간의 흥미로운 생태학에 대한 관심도 소홀히 했다. 이런 연유로 궤양성 대장염 환자에게 돼지편충을 인공 감염시키는 절묘한 치료법에 다가서지 못했고, 기관지천식 환자에게 개의 십이지장충인 개구충을 인공감염시키는 방법 등 최근 이뤄지고 있는 기생충을 이용한 치료법에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이 책에서 저자는 기생충과 숙주의 다양하고 오묘한 상호관계를 실생활에서 접할 수 있는 예들과 함께 쉽게 설명한다. 이와 함께 질병치료나 첨단 의학 연구에 기생충을 이용할 수 있는 현재까지의 연구성과를 통해 새로운 지혜의 문을 열어 젖힌다.
이 책은 기생충의 형태학·생활사·면역학·분자생물학·유전학 등 딱딱한 전문 분야에 대한 내용에 치중하기보다 흥미로운 분류학·생태학·역학·증상·관리에 초점을 맞춰 이해하기 쉽게 다가선다.
모두 7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기생충 ▲한국인의 기생충(1부) ▲한국인의 기생충(2부) ▲세계의 기생충(1부) ▲세계의 기생충(2부) ▲친구로서의 기생충 ▲기생충들의 흥미로운 생활상 등으로 엮어졌다.
기생충학 연구에 평생을 헌신한 저자는 과학적인 접근을 근간으로 기생충학에 대한 편견을 바로잡아준다. 한편으로는 기생충학에서 일가를 이루기까지 직접 겪은 수많은 경험과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일반 독자에게는 어려울 수 있는 전문 영역을 풀어간다. 지극히 과학적이면서도 누구나가 흥미롭게 이 책을 마주할 수 있다.
이 책은 한국과학기술한림원에서 발간한 <석학, 과학기술을 말하다> 시리즈 스물 한 번 째 책이다.
저자는 말한다. "기생충의 궁극적인 목적은 숙주와의 공존입니다. 숙주를 크게 괴롭히면 면역반응이나 염증반응에 의해 기생충 역시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만일 숙주가 죽으면 기생충도 잠시 죽고 맙니다. 숙주를 죽이느라 애쓴 보람은 전혀 없고 기생충 자신이 설 땅도 양식도 없어지게 됩니다. 성공적인 기생생활의 방향은 기생생활에서 기거생활로, 기거생활에서 공서생활(공생)으로 진화하는 것입니다."
이 책을 통해 기생충이 인간에게 전해주는 삶의 지혜를 배운다(☎ 031-955-1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