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준 (전문의 소아청소년과)
세계 역사를 보면 감염병이 유행해 인류의 많은 것을 바꾸어 놓은 사례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중세 유럽의 흑사병이 그랬고 스페인의 남미 침략 때 천연두가 그랬다. 감염병을 퇴치하기 위한 백신 또한 정치와 사회 변화의 중요한 촉매로 작용하는 경우가 있다.
1931년 폴리오의 합병증으로 하반신이 마비된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3선의 대통령을 지냈다. 유명한 '10센트 동전의 행진(March of Dimes)' 운동은 바로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이들을 위한 그의 작품이었고 이 운동은 훗날 국립소아마비재단(National Foundation for Infantile Paralysis)의 창설로 이어졌다.
1988년 전 세계에서 35만 건이 보고됐던 폴리오는 2015년에는 24건으로 크게 감소했다. 하지만 1980년 박멸에 성공한 천연두와 달리, 폴리오에 대해서 만큼은 십 수년째 박멸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폴리오의 박멸이 어려운 까닭 중 하나는 국가나 지역의 정세가 백신 접종에 현저하게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2011년 미군이 파키스탄 북부지역에 은신하고 있던 오사마 빈 라덴을 사살하기 위해 폴리오 예방접종을 가장해 빈 라덴의 가족들로부터 DNA 샘플을 채취한 후 작전을 수행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 사건 이후 파키스탄 북부에서는 예방접종 캠페인을 간첩행위로 의심하는 이슬람 무장세력에 의해 예방접종 팀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아직 야생주 폴리오 바이러스의 전파가 끊기지 않는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일부 지역), 그리고 2013년까지 남아있었던 나이지리아의 경우 무장세력의 움직임이 활발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후로 미국의 CIA는 스파이 작전에 예방접종사업을 활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일부 아프리카 국가에서 백신이 불임을 만든다는 잘못된 믿음으로 접종을 거부하기도 한다. 최근 케냐 가톨릭의사회에서는 파상풍 백신 성분 중 유산을 초래하는 화학물질이 포함돼 있다고 보고하기도 했으며, 이를 나름의 병태생리 기전으로 설명하기도 했다.
이런 음모론이 끊이지 않는 것에는 아프리카 국가들에 오랫동안 전해 오는 백인들에 대한 뿌리깊은 의심과 공포도 작용했을 것이다.
예방접종 사업이 논쟁거리가 되는 것은 정치사회적 상황이 불안한 몇몇 저소득 국가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지난 달 소개했던 백신의 안전성에 대한 논쟁과는 별개로 예방접종 그 자체는 자기 결정권과 사회적 이득이 충돌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1960년대 미국 대통령 존 F. 케네디가 서명한 예방접종 지원 법령을 제정한 이래로 미국에서 예방접종은 어린이의 인권과 건강할 권리, 그리고 부모의 자율적 선택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중요한 정치적 의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다른 모든 사회적 행위와 마찬가지로 예방접종을 옹호하고 반대하는 데에는 종종 정치가 개입하고 있다. 특히 종교나 민족, 이념의 대립이 있는 곳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전세계의 더욱 많은 아이들이 보편적인 예방접종의 혜택을 누리게 하기 위해서는 백신의 과학을 넘어 예방접종에 얽힌 정치적 문제에 대한 관심 또한 필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