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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진기 된장 덮밥
청진기 된장 덮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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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6.08.29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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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웅 이화의대 교수(이대목동병원 산부인과)
▲ 주웅 이화의대 교수(이대목동병원 산부인과

무더위가 절정이었던 지난 8월 중순 학회 참석 차 싱가포르에 다녀 왔다. 따로 계획한 여름 휴가는 아니었지만 일상을 떠나 이국(異國)을 향해 출발하는 순간은 한껏 들뜨기에 충분했다.

이륙 후 두 시간 남짓 되었을 때 기내식 서비스가 시작됐다.

예전에는 기내식으로 고를 수 있는 옵션이 두 가지였는데 언제부턴지 이코노미 좌석의 기내식도 세 가지 중 하나를 고를 수 있도록 다양해 진 것 같다. 상냥한 승무원이 '쇠고기 요리'·'생선 요리'·'된장 덮밥'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알려 준다.

약 1초 동안 6회 정도의 번복, 즉 6 헤르츠(Hz)의 번뇌 끝에 원초적 본능이 지시하는 대로 된장 덮밥을 골랐다.

잠시 후 건네 받은 된장 덮밥 세트를 조심스럽게 펼쳐, 따뜻한 밥에 뜨끈한 된장 소스를 붓고 역시 조심스럽게 정성껏 비볐다 - 좁은 공간에 뜨거운 음식이 차려지는 이코노미석의 식사 시간에는 모두가 조심스러워 진다. 일만 피트 상공에서 맛보는 된장 덮밥은 가히 '구름 위를 나는 듯한 맛'이었다.

여행자의 허전한 장(腸)을 채워주는 구수하고 감칠맛 나는 된장 소스의 오묘함에, 내국인에게 더 비싸게 티켓을 판다는 괘씸함이나 땅콩을 둘러싼 스캔들까지도 어느덧 기억 저편으로 희미해 지고 있었다.-

된장 덮밥 한 그릇에 감동한 수용적(受容的) 입맛의 소지자는 이내 기내식 상념에 잠긴다.

'이것은 혁신이다! 기내에서 먹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상상도 하지 못할 음식을 공급해 승객의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 만족감을 끌어 내고 나아가 비싼 티켓 가격까지 기꺼이 감수하게 만드는 이런 전략이야말로 진정한 혁신이다.'

배도 부르고 속도 편안한 의사 여행자는 다시 의료 분야의 혁신에 대해 궁리하게 된다.
'의료도 마찬가지 아닐까? 새로운 기술이 사용자를 위한 편의와 효율을 제공하고 더 나은 임상 결과를 보장한다면 비싼 가격을 기꺼이 감수하지 않을까?'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의사 여행자는 한국의 엄중한 의료비 지불 프레임을 상기한다.
'새로운 혁신 기술의 사용자는 의사이고 더 나은 임상 결과를 보장 받는 사람은 환자일 뿐, 비싼 가격을 기꺼이 감수해 줄 권한이 있는 사람(들)은 제 3자인 건강보험관리공단이나 심평원이 아닌가!'

오래지 않아 사용자, 소비자의 편에서 불타오르던 혁신 의지는 이내 사그라진다.
'비싼 가격은 언감생심, 정해져 있는 가격이라도 삭감 당하지 말고 온전히 받아야지'

이쯤 되니 된장 덮밥 먹고 편안하던 속이 부글부글 해 진다. 아무래도 기체 밖의 기압이 낮아서 그런 것 같다.
서비스가 주종목인 항공사의 된장 덮밥 개발은 의료보험 수가와 포괄수가제 하에서는 적용하기 힘든 적절하지 않은 비유대상이었다.

의사들은 무엇을 어떻게 혁신해야 하는 것일까? 의사들이 할 수 있는 혁신이 과연 있을까? 제3자 지불제도와 당연지정제 하에서 의사들이 이뤄내야 할 혁신은 대충 이런 것들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소비자가 더욱 만족해 비싼 가격을 기꺼이 지불할 수 있도록 하는 혁신을 동일 가격에 서비스할 수 있도록 해서 다른 의사들로부터 환자를 더 많이 뺏어 오는 것, 인건비와 의료기관 운영비를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 의사 본인이 시간과 노력을 최대치 이상 투입하는 것 등.

비행기 엔진 소음을 벗삼아 혼자만의 상념에 빠져들던 중 문득 바지 위에 흘린 된장 소스의 얼룩이 눈에 들어 왔다.

"이런 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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