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관승 (중앙대 겸임교수 전 imbc 대표이사)
내가 '3치'라 말하면, 흔히 '꽁치·참치·삼치' 같은 생선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있다. 혹은 '유치·백치·후안무치'같은 뜻이냐고 반문하기도 한다. 여기서 3치란 나의 인생을 말한다. 지금껏 나는 세 가지 완전히 다른 직업 세계를 경험하고 있는 까닭이다.
첫 번째 기자라는 직업은 '가치'를 지향한다면, 두 번째 직업이었던 콘텐츠 플랫폼 기업의 CEO 시절에는 '수치'가 중요했다. 반면에 지금 나는 대학에서 의사소통과 스토리텔링을 가르치고 있기에 '브런치' 인생이라 말하고 싶다.
앞의 두 직업에 비해 상대적으로 시간이 자유로운 덕분이다.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사람들과 커피를 마시며 미팅하는 브런치 타임이 가능하기 때문에 그런 표현을 하고 있다.
'가치'를 추구하는 기자란 직업은 글과 말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는 보람과 재미가 있는 대신 늘 시간의 압박과 싸워야 한다. 영어로 데드라인이라는 표현처럼 마감시간, 방송시간을 지키지 못하면 곧 죽음이다. 평소 멀쩡했던 사람들도 기자가 되면 거칠게 보이는 것은 대부분 여기에 원인이 있다.
기자, 특히 방송기자는 늘 대중에게 노출되는 직업이다. 한편으로는 영광이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는 큰 스트레스다. 어제의 격렬했던 대중들의 박수소리가 내일은 차갑고도 잔인한 비난의 목소리로 되돌아올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오랜 경험을 통해 뼈저리게 실감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을 말하라 한다면 나는 번지점프나 태풍, 지진이 아니라 텔레비전 카메라라 말하고 싶다.
두 번째, 조직을 책임지는 경영자나 리더의 일은 숫자에서 시작해 숫자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국 수치(數値)가 나쁘면 수치(羞恥) 당하는 직업이 바로 경영자다. 매출·수익·방문자수·이런 모든 것들이 객관적인 데이터로 나타나야 하고 그 데이터가 나쁘면 최고 책임자인 대표이사는 사임 압력을 받는다.
학창시절 수학과 숫자가 싫어서 이과에서 문과로 바꾼 나였지만, 결국은 그 숫자와 다시 정면 대결해야 하는 신세였다.
나는 숫자를 자꾸 들이밀면 쩨쩨하고 남자답지 못하다고 배웠던 세대다. 그런데 그렇게 말했던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는 자기 수치에는 매우 민감해 했다. 월급 액수·휴가일수·인사고과·성과급 같은 수치들이 조금이라도 기대치 이하로 나오면 몹시도 흥분했다. 수치의 이중성이다. 호연지기도 수치가 좋아야 가능한 것이다.
지금 나는 대학과 대학원에서 학생들을 상대하는 브런치 인생이다. 브런치 인생의 핵심은 시간의 자유다. 시간과 돈의 압박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여유롭다. 낯선 카페에서 쳇 베이커의 재즈 트럼펫과 다크 초콜릿 같은 쓸쓸한 목소리가 섞인 음반 <Let's get Lost>을 들으며 도시의 이방인이 되어보는 것도 과히 싫지는 않다.
가끔 사람들은 내게 묻는다. '3치' 인생 가운데 어떤 직업이 가장 행복했느냐고? 생각해보면 가치와 수치라는 덕목은 인생을 지탱해주는 중요한 양대 기둥이 아닌가 한다. 가치가 빠진 인생은 공허하고, 수치가 약한 인생은 지속가능이라는 측면에서 취약하다. 여기에 한 가지가 빠져있다.
바로 자유다. 획기적인 아이디어와 디자인으로 츠타야서점을 만들어 일본 서점 개념에 일대 혁명을 일으키고 있는 마스다 무네야끼는 <지적자본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자유,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자유, 그것을 얻으려면 신용이 필요하다."
나는 이 말을 뼈저리게 실감한다. 여기서 말하는 신용에는 미팅시간, 기획안 제출시한 같은 작은 약속도 잘 지키는 것도 포함돼 있다. '언제 식사 한번 모시겠습니다!' 같은 마음에도 없는 얘기를 습관처럼 내뱉지 않는 것도 물론 포함된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멋진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유행인가. 요즘 대학생과 직장인들에게 인생의 목표가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한결같이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답이 돌아온다.
이전 세대들이 삶의 가치도 돌아볼 겨를 없이 오로지 일과 직장만을 위해 돌진하다보니 '행복 불감증'에 걸린 세대라면, 지금은 거꾸로 행복이라는 단어에 집착해 흡사 '행복 강박증'에 걸린 듯싶다. 행복은 단칼에 얻어지는 건가? 아니면 한번 얻으면 영생불로하는 묘약같은 것인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정말이지 어려운 개념을 요즘은 너무도 쉽게 말하고또 단번에 얻으려 한다. 괴테는 파우스트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했다.
"그저 놀기에 나는 이미 나이가 들었고, 소망 없이 지내기에 아직 너무도 젊구나."
그 나이란 객관이 아니라 내 마음의 주관적 숫자다. 괴테가 <파우스트>라는 이 대작을 완성한 것은 그가 숨지기 1년 전인 83세 때였다. 행복이란 이처럼 평생 추구해야 하는 과정이 아닐까. 괴테는 성공한 사나이였다. 성공 역시 중요한 단어지만 사람마다 다르게 해석한다. 기준도 다르다.
1960년대를 온통 자기의 시대로 만들었던 반전 문화의 기수였던 가수 밥 딜런이 한 말이 내게는 가장 피부에 와 닿는다.
"아침에 잠에서 깨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성공한 사람이다."
의학용어에 골든타임이라는 것이 있던가? 응급실에서 말하는 생과 사를 가르는 아주 중요하고도 짧은 시간 말이다. 누구나 성공과 행복, 그리고 자유를 원한다. 그것을 원한다면, 무엇보다 지금 내 삶의 저자가 되고 싶다면, 우선 지금 내 일을 사랑해야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것 없이 그토록 원하는 성공, 행복, 자유는 영원히 손에 잡히지 않는 무지개 같은 존재 아닐까. 걱정 없는 집안 없고, 불만 없는 직업 없다. 나의 일을 사랑하는 지금 이 순간이 행복과 자유로 가는 골든타임이라 나는 믿는다.
*필자는 MBC기자와 베를린 특파원 등을 거친 언론인출신으로 iMBC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지금은 세한대학 교수와 중앙대학 겸임교수로 재직중이다. 한겨레신문과 월간중앙에 고정칼럼을 연재중이며 언론중재위원도 맡고 있다. <괴테와 함께한 이탈리아> 등 여러 권의 저서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