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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진기 지금, 이 순간

청진기 지금, 이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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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06.26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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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린 원장(서울 서초·아름다운피부과의원)

▲ 이하린 원장(서울 서초·아름다운피부과의원)

어느덧 여름의 한 가운데로 들어 와 있다. 아직도 낯선 2017년이 벌써 반이나 지나가고 있다니. 기다리던 봄이 순식간에 지나간 것이다. 시간은 내리막길을 달리는 수레바퀴처럼 날마다 가속을 더해서 달려간다. 누군가 잠시만이라도 시간을 멈추어 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중학생이 되던 해 '마흔'이라는 나이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다. 그때 내게 마흔이라는 나이는 더 이상 새로운 것을 시도해 볼 가능성이 없는 나이였다. 그 나이를 훌쩍 넘긴 지금, 내가 깨달은 것은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이 생각보다 많다는 사실이다.

그 중에서도 사람의 힘으로 바꾸기 힘든 일을 두 가지만 꼽으라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 그리고 '시간을 돌이키는 일'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 중 후자는 인간으로서 불가능한 영역이고, 전자는 최선을 다해도 이룰 수 있을까 없을까, 어려운 일이다.

대학생이 된 딸에게 남자친구가 생겼다. 사랑을 하면 예뻐진다더니 딸의 모습은 나날이 예뻐지고 있다. 딸에게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의 중심에서 나는 늘 함께 기뻐하고 흥분하고 슬퍼하며 감정이입이 되고 그 미소에 쉽게 전염돼 간다.

그리고 그 와중에 나의 이십대로 잠깐씩 시간 여행을 다녀오게 된다. 다시 그때로 돌이키고 싶은 많은 순간들. 놓치고 싶지 않던, 조금 더 지혜롭게 해결할 수 있었던 많은 일들, 겁을 내며 움츠리고 씩씩하게 맞닥뜨리지 못했던 일들이 생각난다.

기욤 무쏘의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라는 소설은 우리나라에서도 수년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최근에 영화로도 제작됐다. 누구나 한 번씩은 꿈꾸어 보았을 법한 이야기이다. 60세가 된 외과의사 엘리엇은 죽음을 앞두고, 사랑했던 여인 일리나의 모습을 보고 싶어서 과거로 시간 여행을 하게 된다.

30년 전의 나를 본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사랑하는 여인의 죽음을 막기 위해 엘리엇은 온갖 노력을 하지만 그 선택은 또 다른 운명의 나비 효과를 일으키게 된다. 과거로의 시간 여행을 통해 엘리엇은 인간으로서 운명을 거슬러 산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며 또 다른 대가를 요구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만약 과거의 시간으로 여행할 수 있다면, 가장 돌아가고 싶은 순간이 언제인지 생각해 보았다. 그런데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돌아가고 싶었던 순간들은 화려한 시간들이 아니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사랑 고백을 받거나 피부과 레지던트 합격을 확인했던, 그렇게 완성돼 빛나는 순간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당시에는 전혀 흥분이나 감격없이 지나갔던 조용한 일상의 순간들이거나 나도 모르게 다른 이에게 상처를 준 후회의 순간이었다.

수련을 마치고 첫 직장인 수원으로 출퇴근하기 위해 과천에서 몇 년간 살았던 적이 있다. 거기에는 마치 외국 시골의 작은 마을처럼 평화로운 느낌을 주는 거리가 많았다. 해가 긴 여름, 주말 저녁이면 근처 맛집에서 저녁을 먹거나 도시락을 싸가지고 서울대공원에 잔디밭에 가서 아이와 함께 공놀이를 하곤 했다.

우리들은 돗자리 하나와 마실 음료수만 준비해서 해가 저물 때까지 마치 내 집 뒷마당에서 놀 듯이 한가로운 시간을 보냈다. 아름답고 짧은 영화처럼 그 장면은 내 머릿속에 평화로운 순간으로 남아 있다. 그 때의 장면들이 어떤 순간보다 아름답고 짧은 영화의 한 순간처럼 내 가슴 속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는 것은 왜일까.

아마도 당시에는 그것이 얼마나 값지고 소중한 것인지 알지 못하고 흘려보냈다는 아쉬움 때문이 아닐까.

시간은 절대 역주행하지 않는다. 우리는 미래를 먼저 살아볼 수 없으므로 오늘이라는 시간의 멋진 주인공이 돼야 한다. 그것이 화려하고 주목받는 무대가 아닐지라도 때로는 관객이 소수에 불과할지라도, 그들에게 그리고 무엇보다도 삶의 주인인 나에게 최선의 연기를 보여줘야 한다. '충만한 오늘을 사는 것' 그것이 내가 가장 행복해지는 방법일 것이다.

벌써부터 인턴을 한다고 여름방학 시간을 줄여버린 야속한 딸과의 시간을 공유하기 위해 나는 방학 내내 죽어라고 밥을 해댄다. 한국의 기억이 희미해질까 봐 북촌 마을을 구경시켜주고 한복을 빌려 입고 기념사진도 찍었다. 어린애같이 좋아하는 나를 보며 딸이 그렇게도 좋냐고 묻는다. 그는 아직 모를 것이다. 내가 이런 시시한 일들을 벌이며 기뻐하는 이유를.

다코타 패닝 주연의 <Now is good>라는 영화에서 시한부 선고를 받고 어린 나이에 죽음을 앞둔 주인공은 "Life is series of moments, now is good"라는 독백을 한다. 그렇다, 우리들은 때로는 달고 쓰고 시큼하기도 한 여러 맛의 캔디박스 같은 인생에서 눈을 감고 사탕을 골라먹는 어린아이와 같다.

그 당시에는 맛도 없고 먹는데 오래 걸렸던, 기억나지도 않는 사탕이었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고 돌이켜보면 그것이 행복이라는 이름의 다른 캔디였음을 알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오늘 고를 사탕은 어떤 빛깔의 무슨 맛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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