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진 내용·필요성 살피지 않은 채 60일 업무정지 '위법'
서울행정법원 "부실 심사...재랑권 일탈·남용" 판단
고시에서 정한 '왕진' 절차를 어겼다며 일률적으로 불법으로 규정, 업무정지 처분을 내린 것은 위법하다는 법원 판결이 나왔다. 절차와 규정만 따질 게 아니라 실질적인 내용과 필요성까지 살펴야 한다는 판단이다.
서울행정법원은 보건복지부 장관이 A사회복지법인 B재단의원에 내린 업무정지 처분을 취소하라고 판결했다.
사건은 A사회복지법인 B재단의원이 2013년 7∼9월과 2014년 10∼12월 혈우병 환자의 가정을 방문해 진료한 후 진찰료·주사료 등 의료급여비용을 청구, 9423만 원을 받아내면서 시작됐다.
보건복지부는 의료급여기관이 왕진을 하려면 수급권자 또는 보호자가 '왕진신청서'를 작성해 관할 보장기관에 제출하고, 보장기관이 이를 검토한 후 왕진 인정 여부를 결정, '왕진결정통보서'를 의료급여기관에 송부해야 한다며 규정과 절차를 위반했다고 판단했다.
보건복지부 장관은 '의료급여법 제28조 제1항 제1호(속임수나 그 밖의 부당한 방법으로 수급권자, 부양의무자 또는 시장·군수·구청장에게 급여비용을 부담한 경우)'를 위반했다며 A사회복지법인 B재단의원에 60일 업무정지 처분을 내렸다.
A사회복지법인은 "왕진결정통보서를 받지 않았다는 사유만으로 속임수나 그 밖의 부당한 방법으로 의료급여비용을 수령했다고 볼 수 없다"고 항변했다. 의료기관 문을 닫을 경우 혈우병 환자 진료에 차질이 빚어질 수 있다는 점도 들었다.
재판부는 "의료인은 원칙적으로 개설한 의료기관 내에서 의료업을 하도록 되어 있지만 응급처치가 필요하거나 환자를 의료기관으로 이송하기 현저히 곤란해 의료기관이 아닌 곳에서의 진료행위가 필요한 경우도 있다"면서 예외적으로 의료기관이 아닌 곳에서의 진료행위를 허용하고 있는 '의료급여수가의 기준 및 일반기준(고시) 제15조 제2항, 제3항'을 제시했다.
"왕진결정을 받지 않은 채 왕진이 이루어졌다는 점만으로 실질적 요건을 갖추지 못했다거나 진료가 부당하다고 볼 것은 아니다"고 지적한 재판부는 "보장기관의 왕진결정은 왕진의 필요성이 있다는 점을 사전에 확인하는 의미에 그치는 것이지 왕진에 의해 제공할 의료급여의 적정성까지 담보하는 것은 아니다"면서 "왕진에 따른 급여비용을 지급받을 수 있는지 여부는 왕진에 대한 절차적 흠결과 함께 왕진의 요건도 아울러 고려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재판부는 "B재단의원에서 왕진을 받은 6명의 혈우병 환자들은 현지조사 실시 후에 1년의 왕진결정을 받았다"면서 "왕진의 필요성은 혈우병에 기인한 것이고, 처분 사유가 된 왕진 당시에도 있었을 것으로 추단할 수 있다"고 밝혔다.
B재단의원이 속임수나 부당한 방법으로 의료급여비용을 받아낸 것이 아니라는 데 무게가 실렸다.
재판부는 "실제 왕진대상자에게 의료급여를 제공하고, 의료급여비용을 청구하면서 왕진결정이 있었던 것처럼 허위 기재를 하는 등 부당한 방법을 이용했다는 사정도 보이지 않는다"면서 "B재단의원이 정상적인 절차에 의해 급여비용을 지급받을 수 없었다거나 속임수나 그 밖의 부당한 방법으로 급여비용 지급에 영향을 미쳐 급여비용을 지급받았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또한 "이 사건 고시는 보장기관이 왕진요청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회신한 수급권자의 왕진비용이 청구된 것으로 확인된 경우 해당 요양급여비용을 환수할 수 있다는 규정일 뿐 왕진요청결정을 받지 않은 채 왕진을 한 모든 경우를 환수 조치의 대상으로 규정하고 있지는 않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왕진의 필요성이 있었는지 여부를 구체적으로 살펴야 함에도 만연히 왕진결정이 없이 의료급여를 했다는 점만으로 급여비용 청구를 일률적으로 부당청구라고 판단했다"면서 "처분사유에 대한 심사를 제대로 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꼬집었다.
보건복지부의 재량권 일탈·남용도 인정했다.
재판부는 "환자들은 B재단의원과 멀리 떨어진 곳에 거주하고 있고, 경제적으로 윤택하지 않아 의원 방문이 용이하지 않아 왕진을 요청했던 것으로 보인다"면서 "업무정지 처분으로 달성하고자 하는 의료급여 재정의 건전화와 적정 진료 확보라는 공익이 원고나 혈우병 환자들이 입는 불이익에 비해 크다고 볼 수 없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왕진 환자를 실제로 진료했고, 진료 내용에 상응하는 급여비용을 청구했다"면서 "보장기관의 왕진결정 없이 왕진을 했다 하더라도 그로 인해 의료급여재정에 추가적인 부담을 초래했다고 볼 수 없다"고 밝혔다.
적자를 감수해 가면서 혈우병 환자에게 특화된 의원을 운영하고 있고, 추가적 이득이 없음에도 의료진이 가외로 시간과 비용을 들여가며 원거리에 거주하는 환자들의 편의를 위해 왕진을 한 점도 짚었다.
재판부는 "2016년 10월 31일 현재 국내 혈우병 환자로 등록된 2352명 중 1440명이 B재단의원에서 진료를 받고 있어 업무가 정지될 경우 혈우병 환자들이 적지에 적절한 진료를 받는 데 장애가 초래된다"면서 "사적인 법익의 제한에 그치지 않고, 의료급여 수급권자들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보건복지부 장관의 처분이 공익을 제고하기 위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한편, 보건복지부 장관이 업무정지 처분에 갈음해 과징금을 부과할 재량이 있음에도 업무정지 처분을 한 것은 공익과 사익의 형량이 지나치게 잘못돼 비례원칙에 위배된다고 덧붙였다.
국내 혈우병 환자는 혈장 내 제8응고인자가 부족한 혈우병A 환자가 80%에 달하며, 나머지 20%는 혈우병B 환자다.
혈우병A 치료제는 애드베이트(박스터)·그린진에프(녹십자)·코지네이트(바이엘)·진타솔로퓨즈(화이자)·에미시주맙(JW중외제약)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