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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진기 어떤 레지던트
청진기 어떤 레지던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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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08.16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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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찬경 원장(인천 부평·밝은눈안과의원)
▲ 정찬경 원장(인천 부평·밝은눈안과의원)

"저기…. 환자 보호자인데요, 주치의 선생님을 좀 만나고 싶습니다."
나는 낯선 병동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아! 제가 주치의입니다."
그는 바쁜 와중에도 반갑게 우리를 맞아주었다. 이어 악수를 하자며 손을 내밀었다. 약간 당황했지만 그의 손을 기꺼이 받아 꼭 쥐었다. 그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 병동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그의 말에 나와 아내도 잠깐 서로를 바라본 뒤 웃으며 화답했다.
"네. 저희도 반갑습니다."

그곳은 구강외과 병동이었다. 아들의 사랑니를 감싸고 생긴 치성각화낭종(odontogenic keratocyst)을 제거하기 위해 대학병원 치과에 입원을 한 날 저녁이었다. 스테이션에서 서너 명의 간호사가 바삐 일을 하고 있었다. 정면의 데스크에서 골똘히 업무를 보다가 우리를 맞아준 앳된 모습의 레지던트는 착하고 영민해 보였다.

"내일 수술이시죠? CT랑 엑스레이 사진 봤습니다. 만만치 않아 보이긴 하던데 아마 잘될겁니다. 너무 걱정 마세요."

우리를 안심시키려는 듯 말했다. 하지만 우린 꽤 걱정스러웠고 더욱이 아들에게 처음으로 전신마취를 시키는 일이라 긴장하고 있었다.

"하는 김에 나머지 세 곳의 사랑니도 제거할 겁니다. 괜찮으시죠?"
"안 그래도 그것 땜에 고민 중이었습니다. 한꺼번에 하면 좋긴 할 텐데 그렇게 하면 얘가 힘들지 않을까 해서요. 이번에는 낭종 하나만 제거하고 싶은데요."

"아 네…. 고민해 보시고 다시 알려주세요. 그럼 이만."
그는 다른 곳에 처리할 일이 있다며 표표히 가운 자락을 날리며 병실 쪽으로 사라졌다.

친분이 있는 치과의사들에게 자문 끝에 전신마취를 한 김에 나머지 사랑니 모두를 제거하기로 결심을 했다. 그 결정을 알려주기 위해 밤 10시쯤 되어서 주치의를 찾으러 다니다 복도에서 만났다. 내용을 말하자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 그렇게 결정하셨어요? 교수님께 이미 종양만 하길 원한다고 말씀드렸는데…. 알겠습니다. 근데 제가 지금 잠깐만, 잠깐만 다녀와서 말씀 드릴게요."

그의 안색은 좋지 않았고 뭔가 급하면서도 힘든 일이 있어 보였다.
밤 11시가 넘은 시간에 그가 찾아왔다. 당직이어서 그런지 그 시간까지 쉴 새 없이 일을 한 눈치였다. '참 수고가 많구나. 나도 저 때 저렇게 힘들게 일을 했었던가' 하는 생각을 할 무렵 그가 말했다.

"지금 데스크로 가서 수술 설명해 드리고 동의서를 받겠습니다. 함께 가시지요."
데스크에서 그가 늘 일을 보는 책상 옆에 나란히 앉았다. 부스스한 머리를 하고 헐렁한 수술복 위에 가운을 걸친 그는 몹시 피곤해보였다. 창백한 얼굴 위에 눈만 형형히 빛났다. 아무리 젊다 해도 저러다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조금은 걱정스러웠다.

태블릿컴퓨터를 들더니 동의서 파일을 찾아 펼쳤다. 질환, 치료 목적과 방법, 예후, 합병증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십여 곳에 사인을 해주었다. 태블릿 화면 위에 손가락으로 사인을 하는 동안 오래 전의 일이 떠올랐다.

"보호자 분, 여기에 도장 찍으세요. 손가락으로 지장 찍으셔도 되구요."
안과 레지던트 시절, 병실에는 백내장 수술을 받을 환자들이 가득했다. 밤이 되면 그들을 나오게 해서 데스크 앞에 세워놓고 동의서를 받았다.

"할머니, 할아버지, 잘 들으세요. 백내장 수술이란 말하자면 이런 겁니다. 예를 들어 감이 있는데 이 감이 너무 익어서 홍시가 되어 터지려고 해요. 그래서 터지기 전에 미리 감에 동그란 구멍을 내서 속을 깨끗이 긁어내주는 거예요. 그런 다음에……."

그 때 내 뒤에 있던 간호사가 환자가 돌아간 후 내게 말했다.
"선생님이 말할 때 홍시가 너무 먹고 싶어서 혼났어요."
모두 깔깔거리며 웃었고 그날은 뭔가를 배달시켜 함께 야식을 먹었다. 내 청춘의 땀과 애환이 배어 있는 그 건물과 병동은 어떤 모습으로 변해 있을까. 회상에 잠겼다.

"아, 참! 아까는 죄송했어요. 그때 제가 와이프랑 싸운 뒤였는데 정말 너무 힘이 들어서 잠깐 쉬어야만 했거든요. 동의서 받을 때 보니 의사이신 것 같아요. 맞죠?"

내가 맞다 했더니 '그럼 더 잘 이해하실 것 같다'는 표정을 지으며 한숨 섞인 소리로 말했다.
"글쎄 내가 이렇게 바쁜 걸 뻔히 알면서도 자신에게 관심이 부족하다며 따지고 괴롭히는 거예요. 전화로 계속 얘기해봐야 더 꼬여만 가고, 아까는 정말 화가 나서 미치겠더라구요."

이렇게 하소연을 해서라도 그에게 쌓인 스트레스가 조금이라도 풀리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부부의 갈등 같은 속내까지 얘기할 정도로 짧은 시간에 우리 둘이 친해진 게 참 신기했다. 나도 그런 그가 싫지 않았다. 귀엽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다.

한편 '그렇게 뛰고 고뇌하고 정신없이 바쁠 수 있는 것 모두가 젊음의 특권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가운의 가슴 쪽에 '구강외과 ○○○'라고 쓰인 글씨가 그의 청춘처럼 반짝거렸다.

그의 모습 위에 22년 전의 한 젊은 의사의 모습이 겹쳐졌다. 흰 가운 하나를 작업복처럼 걸치고 외래와 병동, 수술실을 종횡무진 누비고 다니던 그 시절의 내가 그리워졌다. 밤은 깊어가고 병동은 고요해졌다. 어두운 병실에서 낮고 좁은 보호자용 간이침대에 몸을 뉘였다. 레지던트 시절의 일들이 하나 둘 자꾸만 떠올라 잠을 이룰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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