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샤넬 그려…시인 기욤 아폴리네르 연인
유화·석판화·수채화·사진·일러스트 총 160여점 선보여
프랑스를 대표하는 여성 화가 마리 로랑생(1883∼1956)의 국내 첫 특별전 '마리 로랑생展-색채의 황홀'이 9일부터 2018년 3월 11일까지 예술의전당에서 선보인다.
황홀한 색채로 파리의 여성들을 화폭에 담아냈던 프랑스 대표 여성 화가 마리 로랑생…. 이번 전시는 프랑스 천재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의 명시 '미라보 다리'의 주인공으로 알려진 그녀의 대규모 회고전으로 70여 점의 유화와 석판화·수채화·사진과 일러스트 등 총 160여 점의 작품을 한자리에서 관람할 수 있다.
야수파 소녀에서 파리지엥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로
마크 샤갈과 더불어 세계 미술사에서 색채를 가장 아름답게 표현해낸 작가로 손꼽히는 마리 로랑생은, 입체파와 야수파가 주류이던 당시 유럽 화단에서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스타일을 완성한 여성 화가다.
'마리 로랑생-색채의 황홀'전은 그녀가 20대 무명작가 시절부터 대가로서 73세의 나이로 죽기 직전 붓을 놓지 않았던 시절까지, 전 시기의 작품을 작가의 삶의 궤적에 따라 추적해가는 방식으로 구성됐다.
마리 로랑생과 관련된 사진 19점을 소개하는 도입부를 지나 ▲1부 '청춘시대' 섹션에서는 마리 로랑생이 화가 브라크와 함께 파리의 아카데미 앙베르에 다녔던 시절 그렸던 풍경화와 정물화, 자신의 초상화와 피카소의 초상화 등이 소개된다.
▲2부 '열애시대'에서는 입체파와 야수파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뚜렷이 나타나면서도 자신만의 고유한 스타일이 드러나기 시작한 작품들이 공개된다.
▲3부 '망명시대'는 기욤 아폴리네르와 헤어진 뒤 급하게 독일인 남작과 결혼하지만, 신혼생활이 시작되기도 전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스페인으로 망명 생활을 떠나게 된 시기이다. 이 시기 작가가 느낀 고통과 비애, 외로움 등을 표현하며 자신만의 색깔을 더욱 강하게 드러내는 작품들이 선보인다.
▲4부 '열정의 시대'에서는 1차 세계대전 이후 남편과 이혼한 뒤 마음의 고향이었던 프랑스 파리로 돌아와 본격적으로 자신의 예술 세계를 유럽은 물론 미국에까지 알리게 된 시기의 유화 작품들을 소개한다. 특히 4부에서는 1924년 마리 로랑생이 의상과 무대디자인을 담당해 큰 성공을 거둔 발레 '암사슴들'의 에칭 시리즈도 살펴볼 수 있다.
▲5부 '콜라보레이션' 섹션에서는 북 일러스트 작가로도 활동했던 작가의 성취를 살펴볼 수 있는 38점의 수채화와 일러스트 작품들이 전시된다. 작가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프랑스 대표 실존주의 작가 앙드레 지드가 쓴 '사랑의 시도'를 비롯해 오페라로 더 잘 알려진 알렉산더 뒤마의 '춘희', 영국 작가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캐서린 맨스필드의 '가든파티' 등의 북 커버와 책 안의 일러스트를 담당했다.
이 밖에서도 이번 전시에는 마리 로랑생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쓴 기욤 아폴리네르의 시집 '알코올'을 비롯해 마리 로랑생이 1942년 출간한 시집 겸 수필집 '밤의 수첩' 등이 전시된다. 또 시를 직접 필사해보고 시 낭송을 감상해보는 특별한 코너도 마련돼 직접 체험하는 전시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미라보 다리 아래 센 강은 흐르고
우리의 사랑도 흘러내린다
내 마음 깊이 아로새기리
기쁨은 늘 고통 뒤에 온다는 것을
밤이여 오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가고 나는 남는다
시 '미라보 다리' 중에서
에포크', 아폴리네르 '미라보 다리'의 운명적 사랑
마리 로랑생은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이었던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평화와 번영이 계속되며 전 세계 예술가들이 몰려들었던 파리의 시기를 지칭하는 '벨 에포크'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로, '예술가의 예술가'라 불리기도 한다.
우리말로 '아름다운 시절'이란 뜻을 담은 이 시기와 1·2차 세계대전을 전후해 그녀는 피카소와 기욤 아폴리네르는 물론 장 콕토·앙드레 지드·마리아 릴케·코코 샤넬·헬레나 루빈스타인·서머셋 몸에 이르기까지 당대의 예술가들과 활발하게 교류했다.
그 시작은 피카소의 가난한 무명작가 시절, 몽마르트의 허름한 건물 바토 라부아르(세탁선)에서부터 시작됐다. 화가 브라크의 소개로 젊은 작가들의 아지트였던 이곳을 드나들던 스무 살의 마리 로랑생은 아름답고 쾌활하며 묘한 매력을 발산, '입체파의 소녀'·'몽마르트의 뮤즈'로 불리며 젊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는 뮤즈가 됐다.
한편, 피카소의 소개로 훗날 모더니즘 문학의 선구자로 불리게 되는 기욤 아폴리네르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그들은 모두 사생아였고 이는 둘 사이의 묘한 동질감을 형성하는데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마리와 사랑에 빠진 아폴리네르는 "마리 로랑생의 예술은 우리 시대의 명예이다."라는 헌사를 바치며 마리의 작품 세계를 알리는 데 노력했다.
그러나 5년간의 짧은 사랑은 기욤 아폴리네르가 루브르 박물관의 모나리자 도난 사건의 주범으로 몰리게 되면서 파국을 맞게 된다. 어머니의 급작스러운 죽음 속에서 마리 로랑생은 독일 귀족 출신의 화가 오토 폰 바예첸 남작과 결혼을 감행한다.
1912년 '파리의 야회'지에 아폴리네르는 '미라보 다리'를 발표하며 실연의 아픔과 상실감을 드러냈다. 5년간 뜨겁게 사랑을 불태웠던 마리 로랑생과의 결별을 아쉬워하는 시인의 마음을 표현한 이 시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시가 됐다. 또 세계적인 샹송 가수 이베뜨 지로와 음유시인 레오 페레 등이 불러 불후의 명곡이 됐고 프랑스를 대표하는 노래로 불린다.
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독일인 남편과의 결혼생활에 실패한 마리는 색채에 대한 섬세하고 미묘한 사용과 자신만의 독특한 기법을 통해 그 어떤 예술가와도 다른 자신만의 화풍을 개척해 나가기 시작한다.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10년간 그녀는 예술 활동에 집중했다. 명사들의 초상화 주문이 끊이지 않았고 의상과 무대 디자인은 물론 도서와 잡지 표지에 이르기까지 그녀를 필요로 하는 이들은 넘쳐났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악화된 건강과 사회적인 고립으로 인해 마리 로랑생의 작품은 정형화되기 시작한다. 결국 1950년대 그녀의 작품은 완전히 잊혀지지는 않았으나 지난 시대의 유물처럼 여겨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노 작가는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매일 캔버스 앞에 앉아 그림을 그렸고 죽기 며칠 전까지 "내게 그림을 그리는 재능이 더 있었더라면!"이라고 탄식할 정도로 예술 혼을 불태웠던 위대한 예술가였다.
1956년 6월 8일 일요일 밤, 심장 마비로 자택에서 숨을 거둔 마리 로랑생은 오스카 와일드와 쇼팽 등이 잠든 페르 라셰즈 공동묘지에 안장된다. 한 손에는 흰 색 장미를 다른 한 손에는 운명적 사랑을 나눴던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에게 받은 편지 다발을 든 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