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 추상조각의 아버지 '김종영 - 붓으로 조각하다'展

한국 현대 추상조각의 아버지 '김종영 - 붓으로 조각하다'展

  • 윤세호 기자 seho3@doctorsnews.co.kr
  • 승인 2018.01.05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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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 2월 4일까지 전시
서화·서예·드로잉·사진과 유품 등 총 180점 소개

전시장 전경.
전시장 전경.

오는 2월 4일까지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 '김종영 - 붓으로 조각하다'전이 선보이고 있다.

이 전시는 한국 추상조각의 선구자로 불리는 '우성 김종영'의 폭 넓은 예술 세계를 재조명하고, 김종영의 조각 작품 외에도 서화·서예·드로잉·사진과 유품 등 총 180여 점이 소개되는 전시로 특히 김종영이 애장했던 추사 김정희의 '완당집고첩阮堂執古帖'이 전시된다. 이 서첩은 국내 처음으로 일반인에게 공개된다. 

'한국 현대 추상조각의 아버지'로 불리는 우성 김종영….

그는 전통 서예와 서화에서도 큰 업적을 남겼다. 이번 전시를 통해 김종영의 조각언어를 '전통과 현대의 일치' 또는 '내재적인 것과 외래적인 것의 하나 됨'이라는 결정적인 해독의 키워드로 온전하게 읽어낼 수 있다.

김종영 예술 위업의 진정한 가치는 20세기 서화(書畵)에서 미술로의 대전환기에 '사의(寫意)'라는 동양전통으로 '추상(抽象)'이라는 서구현대를 녹여냄으로써 동서예술이 나아갈 방향을 실천적으로 제시한 데 있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는 이러한 김종영 예술의 한국적 특수성과 세계적 보편성을 동시에 조망할 수 있는 기회다. 특히 그의 조각이 서예나 문인화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고, 더 나아가서는 그의 '불각(不刻)'이라는 조각언어가 철저히 일상생활 속 통찰과 비판적 해석에서 탄생된 것임에 주안점을 뒀다.

전시장은 모두 6개의 주제로 구성했다.
 
 

▲ 창작산실
첫 번째 섹션 '창작산실(불각재不刻齋)'은 김종영 예술세계의 정수를 한 눈에 살펴 볼 수 있는 공간이다. '불각재不刻齋'는 김종영이 자신의 작업실 편액을 염두에 두고 쓴 작품이다. 깎아 형상을 만드는 것이 업인 조각가가 자신의 작업실을 불각, 즉 '깎지 않는 곳'이라고 했으니 일종의 모순이다.

김종영은 자신의 서예작품에 낙관할 때 '불각도인不刻道人'이라고도 하고 '각도인刻道人'이라고도 했다. 연도를 확인 할 수 있는 작품 중에 각도인이라 낙관한 작품은 1949년부터 찾아볼 수 있다. 이에 반해 불각도인은 1974년부터이다.

시간이 지나며 점차 그는 역설을 추구하게 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실제로 그는 '不刻의 美'라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이 글을 살펴보면 1964년 경 그는 고대 중국인들이 '불각의 미'를 숭상한 이유가 인위적인 것을 최소화 한 자연스러움의 미를 추구한 것과 더불어 형체보다도 뜻을 중히 여겼기 때문이라고 했다.

결국 자연스럽고 단순한 '불각의 미'는 '졸박(拙朴)의 미'와도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졸박'의 의미가 '꾸밈이 없고 자연스러우며, 지혜를 써서 꾸미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졸박의 미'는 조선의 선비들이 추구했던 미학이다.

김종영이 선비의 미학에 입각한 조각가였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불각의 미를 추구한 김종영은 복잡하고 정교한 기법을 싫어했는데 그 이유는 숙달된 특유의 기법이 자신의 예술 활동에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가능한 단순한 표현과 기법을 추구했으며, 자신의 지향점을 '표현은 단순하게, 내용은 풍부하게'라고 함축적으로 정리했다.
 
 

전시장 전경.
전시장 전경.

▲ 초월을 잉태하다
우리에게 친숙한 동요 '고향의 봄'에 나오는 '꽃 대궐'이 바로 경남 창원 소답동에 위치한 김종영의 생가다. 현재 생가로 알려진 본가 옆에 도로를 사이에 두고 '사미루(四美樓)'란 별채가 있다.

'사미루'라고 하는 이유는 문간채 2층 처마에 건 현판이 석촌 윤용구가 쓴 사미루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곳에서 글씨를 잘 쓰고 학예에 능했던 부친의 교육과 더불어 여러 문사들의 교류를 지켜보며 자랐다.

당시 조선 사대부의 학예 전통을 가풍으로 익히게 된 것인데, 조선 사대부 고급문화를 어릴 적부터 몸으로 익힌 것이다.
 
 

▲ 너를 찾아서
일제 식민시절 서구미술을 객관적으로 수용하는 시기를 다뤘다. 당시 미술을 전공하기 위해서는 일본 유학은 필수였으며, 그들은 개화론자의 입장과 유사하게 전통 서화를 비하했다.

이 속에서 어떻게 김종영의 의식세계가 작품으로 투영돼 나오는지 살펴 볼 수 있다. 
 
 

▲ 동서예술 통찰과 추상미술
어려서부터 체화된 서예 학습방법인 임서(臨書)를 토대로 서구 미술을 연구한 시기다. 외국작가의 작품집을 펼쳐놓고 깊이 관찰하며 세밀하게 따라 제작한 그는 서구추상미술의 흐름과 서화의 전통을 비교 성찰하는 것을 병행한다.
 
 

\'완당집고첩\' 유희삼매 서첩, 김종영미술관 소장.
'완당집고첩' 유희삼매 서첩, 김종영미술관 소장.
김종영의 \'세한도\'.
김종영의 '세한도'.

▲ 역사와 실존의 대화
환갑을 바라볼 즈음 조각가 김종영은 다시 서화로 회귀해 자신을 성찰한다. 그는 생전에 추사 김정희를 자신의 사표로 삼았으며 특히 추사의 '완당집고첩(阮堂執古帖)'을 애장해 즐겨 감상했다.

이 서첩 첫 장은 '유희삼매(遊戱三昧)'로 시작하며 다음은 고인개집고(古人皆執古) 불사동아비(不辭凍餓悲), 즉 '옛 사람은 모두 옛 도를 지키면서 추위와 배고픔을 마다하지 않았네'라고 시작하는 오언절구 시이다.

김종영은 이 '유희삼매'를 예서로 쓰고, '세한도'를 그리고 '유희삼매'와 '완당과 세잔느'라는 제목의 단상을 쓴다. 1920년대 미술인들이 힐난한 서화가들의 행태, 즉 '옛 것을 그저 베끼기만 하는 것'으로 오인된 방작과 임서를 그는 그렇게 묵묵히 한다. 
 
 

▲ 생명의 근원에서
추사를 사표로 삼은 김종영이 '입고출신(入古出新)'해 궁극으로 지향했던 바는 유희삼매의 경지에 도달해 느낄 수 있는 자유였다.

그래서 그는 "작가에게 작업하는 시간이 쉬는 시간이고, 손을 쉬는 시간은 온갖 잡생각을 해야 하고 생활을 고민해야 하는 괴로운 시간"이라 했다. 또 "유희란 것이 아무 목적 없이 순수한 즐거움과 무엇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에서 이뤄지는 것이라면 다분히 예술의 바탕과 상통된다"라며 "동서고금을 통해 위대한 예술적 업적을 남긴 사람들은 모두 '헛된 노력'에 일생을 바친 사람들이다.

현실적인 이해를 떠난 일에 몰두할 수 있는 유희적 태도를 가질 수 있는 마음의 여유 없이는 예술의 진전을 볼 수 없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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