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진기 어느 말기암 환자의 당당한 희망

청진기 어느 말기암 환자의 당당한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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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01.29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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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은주 서울의대 교수(분당서울대병원 재활의학과)

양은주 서울의대 교수(분당서울대병원 재활의학과)

피아노 앞에 정말 오랜만에 앉았다.

우연히 유튜브를 통해 듣게 된 베토벤 피아노 교향곡 8번 비창 1악장의 비장한 선율이 중학교 시절 음악 실기 시험 기억을 상기시켰다. 잘 치지는 못하고 박자를 맞추지도, 강약을 잘 조절하지도 못했지만 지금 다시 악보를 사서 연습을 하면 그만큼은 잘 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뿔싸. 손가락이 돌아가지를 않는다. 아무것도 몰랐던 중학생 보다 감정을 더 잘 실으며 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몸이 따라가지 않는다. 실망감이 더 크다.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든가보다.
이번에 여러 과를 걸쳐서 재활의학과로 전과를 온 환자분이 있다.
그는 2016년에 진단을 받았다. 

허리가 너무 아파 응급실에 와서 들은, 척추에 전이된 폐암 말기라는 사실은 생각보다 힘든 진단이었을 것이다. 
지난번 항암 치료 후 재활의학과로 전과해 열심히 운동하고 걸어서 퇴원했던 좋은 기억을 갖고 있는 분이다.
이번 항암 치료 후에 다시 오셨다. 이번에도 열심히 하면 좋아지려니 기대감을 가득 품은 채로….

"잘 하고 계시죠?"
치료실에 내려간 환자분은 못 뵙고 보호자인 부인께 가볍게 여쭙는다.

"생각처럼 몸이 따라 주지 않아 실망이 오히려 더 크셔요. 지난번보다 많이 아프고 기운이 없어 하시네요. 진통제를 강하게 먼저 먹고 투약후 치료실에 가서 걷겠다고 내려가서는 이전만큼 힘이 안 받쳐주니 걷기도 힘들고…아무래도 무리 같아요. 어제 혈액종양내과 교수님이 다녀 가셨는데, 올해 4월에 계획한 출판 기념회와 정년퇴임식 일정을 좀 더 앞당기라고…."
눈물을 글썽이고 말을 잇지 못한다.

"출판 기념회요?"
"이이가 원래 글을 쓰시거든요…. 지금까지 쓴 글들을 잘 모아 기념하려 준비하고 있었어요."
진단을 받은 후에 경험했던 이야기들, 생각들을 정리한 글들을 매주 썼다고 한다. 그 중 최근 글 하나를 건네줬다. 집에는 훨씬 많은 원고들이 있다고 한다.

"다른 방법이 있을지도 몰라요. 저도 같이 찾아볼께요. 오늘 운동 열심히 하라고 전해주세요." 웃으며 손을 잡아드리고 별 생각 없이 병실을 나왔다.

보통 환자분들이 와서 좋아졌다고 하면 덩달아 나도 기분이 좋다. 근력은 있어도 누워만 있던 분들이 뭐라도 붙잡고 걷기 시작하면 괜히 뿌듯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암의 진행으로 통증을 조절하기 힘들고, 체력이 떨어져 이전만큼 못 걷는 상황에서 의료진의 생각보다 더 큰 목표와 기대를 갖고 있는 분을 만나는 것은 오히려 힘든 일이다. 어찌할 수 없는 무력감과, 현실을 받아들이도록 인식하는 자체가 부담이다.

다음 날 갑자기 열이 나기 시작하더니 상태가 나빠졌다. 급히 촬영한 흉부 사진에서는 한쪽 폐가 하얗게 변해 있었다. 폐렴이었다. 말기암 환자들의 폐렴은 정말 위험한 마지막 사인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계속 지켜보고 있던 전공의와 혈액종양내과 주치의 선생님이 신속하게 호흡기 내과 병동으로 환자분을 옮기고 폐렴 치료를 시작했다. 그 후 며칠을 그만 잊어 버렸다. 어려우시겠구나. 한 번은 찾아가 뵈야 하는데….

며칠 후 우연히 만난 담당 선생님이 괜찮아지셨다고 열이 내리셨다고 소식을 전한다. 며칠을 바쁘다는 핑계로 못가다 옮겨 간 호흡기 내과 병실로 찾아 갔다. 훨씬 편안한 얼굴로 반갑게 맞아 준 환자분은 살 만하니 병실에 가만히 누워있는게 심심하다고…이제 다시 재활 운동도 하고 싶다고… 하셨다. 걸어서 나가고 싶다고 하셨다.

잠시 못 뵌 일주일 사이 보호자분이 그동안 쓴 글들을 집에서 가져와 내게 전달하려고 기다리고 계셨나보다.
<의협신문> 기고하는 난이 있는데 그 때 같이 올려드릴 수 있으니 짧게라도 글을 써달라는 부탁을, 기억하고 기다리고 계셨다.

이제 기운이 없어서 더 이상은 새로운 글은 쓰지 못할 것 같다고 그래서 나에게 미완성의 글들을 전해주고 싶다고 했다. 나는 그날 밤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하나 하나 그 분의 글들을 무거운 마음으로 읽어 보았다. 나에게 과연 이런 글을 읽을 권리가 있을까 하는 생각과, 내가 이 글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일년 동안 정말 열심히 치료를 받았고, 글을 썼고, 삶에 의미를 부여하려고 애를 썼던 흔적들, 암을 이겨 새로운 삶의 의지로, 소망으로, 늘 끝내고 마는 생각의 단편들을 수십장 읽어 내려갔다.

의미를 찾는 빅터프랭클의 이야기가 맞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과연 인간의 의지만으로 얼마나 많은 변화를 맞을 수 있을는지. 의사로서는 늘 의문이 든다. 하지만, 암 진단을 받고, 1년이 넘게 씩씩하게 살아오신 이 환자분의 모습들을 글로 읽어 보니, 나도 왠지 그 분의 의지 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 실체를 경험하는 것일까. 비록 조금은 과한 희망이나 의지일지라도, 그런 모습은 참으로 당당하게 느껴졌다. 

그 분이 원한 것은 두 가지였다. 준비한 출판 기념회를 통해 그동안 글을 전하는 것, 하나는 걸어서 퇴원하는 것.
스스로의 힘으로 걷는다는 것은 결국 인간의 존엄성의 표현일 수 있다. 의사는 흔히 위험하다고 걷는 것을 포기하라고 쉽게 이야기 한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환자는 내일 쓰러지더라도 오늘 걷는 것이 자신의 삶을 의미있게 만드는 일일 수도 있다. 이런 환자 앞에서 의사들의 과학적인 판단은 스러지고 만다.

결국 우리는 환자가 필요한 일을 해주는 사람인 것이다. 나의 판단 이전에 환자의 필요가 있다는 말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환자분이 주신 많은 글 들 중 하나를 그대로 전하며 마무리 하려 한다.

"폐암, 너는 죽었어!!"

- 양은주 교수의 그 당당한 말기암 환자  글 · 문태홍

오랜만에 성남에 사는 친구를 만났다.
이 친구는 군대에서 만나서 같이 창고 같은 사무실에서 3년간 함께 근무한 친구다.
나는 세무계를 보았고 그 친구는 2.4 종계를 봤었다.

강원도 인제에서 만난 울산 소년, 아니 청년이었고 나는 경기도 광주 사람으로서 군대서 만났다.
그는 서울대 약대생, 나는 한국신학대학생이었던 청년들이 그 후 3년간 한 사무실에서 근무하고 비슷하게 헤어졌는데 성남에서 만난 것이다.

그는 성남에서 약국을 세워서 충실하게 약국을 운영하고 있었고, 나는 성남에서 세 군데 교회를 개척하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주변머리 없는 충실한 학생들이었다고 볼 수 있다. 전공한대로 진출해서 충실하게 살고 있었는데 말이다.

오늘 8개월만에 그의 약국을 찾았다. 8개월 동안 안 보인 나에게 전화 한 통 없었던 걸 보면 뭐 그리 친한 사이도 아니었던 것 같다. 만나자마자 그는 나를 유심히 뜯어보더니 미심쩍은 미소를 띄며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이니? 아니 그 스틱은 또 뭐니?" 다그쳐 물었다.

나는 그대로 설명했다.
"작년 11월 쯤 엄청 고생을 했고, 119타고 서울대학병원 응급실에 입원해서 폐암 말기 진단을 받았어. 폐암이 전이되면서 척추 9번 신경을 파괴시켜 그렇게 아팠던 것이었단다. 결국 척추 수술을 하고 입원 8개월 후에 퇴원해 항암치료를 8번째 하고 난 모습이 오늘 네가 보는 이 모습이다"고 했더니 약사로 평생 살아온 그 친구가 하는 말이 "도저히 그럴 수 없다.

네가 죽었던지 아니면 적어도 바라보기에도 안쓰러운 전형적인 암 말기 환자를 생각하면…그럴 수는 없다"라며 말을 잇지 못하고 무슨 괴물을 본 듯 이리저리 응시하면서 "아유! 그렇게 중병에 걸려서 고생 많이 했구나"하면서 "몸조리 잘 하래이"하며 서둘러 말을 맺고 만다.

아직도 암에 걸리면 더군다나 말기 암으로 판정됐다면 죽는다는 공식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한심하다. 더구나 약사로 40여년 이상을 살아온 현역 약사가 말이다.
나는 그 친구한테 확신했다.

내가 폐암 말기에 걸린 것이 아니라 폐암이 나한테 걸린 것이다라고 말이다.
그래서 내가 폐암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라 폐암이 나한테 걸렸기에 죽는다고 했다. 그렇다. 나한테 걸린 폐암은 조금씩 조금씩 살아서 아마 그 흔적도 없어질 것이다,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

어떻든 입원할 때의 74.5kg의 체중을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으며 얼굴이 더 좋아지고 빛나고 있다고 보는 사람들이 놀라고 있다. 감사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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