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개월간 의협 투쟁 이끌며 대규모 집회 등 추진
추위 떨며 12시간 철야 시위 "회원들께 감사"
작년 9월 의협 임시 대의원총회 의결로 구성된 '의협 국민건강 수호 비상대책위원회'는 문재인 케어에 대한 협상과 투쟁의 전권을 위임받아 의료계 투쟁의 전면에 나섰다.
의약분업 당시보다 더 큰 위기감 속에 의권투쟁의 선봉에 선 비대위가 4월 22일 정기대의원총회 결의에 따라 4월 30일 자정을 기해 해산했다.
약 7개월의 활동 기간 동안 전국 의사 총궐기대회, 전국 의사 대표자대회 등 대규모 집회, 청와대 앞 시위 등을 활발히 전개한 비대위는 2000년 의권쟁취투쟁위원회 이래 가장 높은 투쟁성을 보여준 의료계 비상기구로 평가받는다.
특히 적극적인 장외 투쟁은 정부를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으며, 의협 회장 선거 기간과 맞물린 의료계 내부의 혼란기를 추슬러 투쟁의 동력을 신임 집행부로 잇는 가교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 공로도 인정받고 있다.
스스로 총대를 메고 삭발까지 감행하며 투쟁의 선봉에 선 이필수 전 비대위원장(현 의협 부회장)을 만나 그간의 소회를 들어봤다.
□ 짧고 굵은 비대위였습니다. 소감이 남다를 것 같습니다.
지난 7개월은 힘들면서도 한편으로는 보람찬 기간이었습니다. 제가 1999년부터 의사회 활동을 시작한 지 20년이 다 돼가는데, 비대위원장을 맡은 기간은 현장에서 온갖 현안과 직접 부딪히면서, 의료계의 현실과 미래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었던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부족한 저를 믿고 따라주신 13만 회원님들과 생사고락을 함께 한 40인의 비상대책위원회 위원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작년 9월 비대위 출범 당시 위원장에 자원하셨습니다. 어떤 각오셨습니까?
정부는 지난해 8월 의료계와 한마디 상의 없이 일방적으로 문재인 케어라는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정책을 발표한 뒤, 연말까지 마무리하려고 밀어붙이는 분위기였습니다. 게다가 정치권 일부에선 한의사에게 의과 의료기기 사용을 허용하는 법안을 추진하는 등 의료계는 의약분업 사태 이후 가장 큰 위기를 맞았지요. 두 가지 현안을 해결하라는 임무를 띠고 비대위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누군가는 책임지고 위원장을 맡아 위기를 극복해 나아가야 할 상황이었습니다. 온몸을 던져 강력한 투쟁을 바탕으로 위기상황을 극복하겠다는 각오로 비대위원장에 나섰습니다.
□ 비대위 출범 이후 불과 2개월여 만에 의사 회원 3만여 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궐기대회를 개최했습니다. 대회가 성공을 거둘 것이라는 사실을 예상하셨습니까?
잘 아시겠지만 의약분업 투쟁 이후 회원의 투쟁 동력이 많이 약화된 것이 사실입니다. 총궐기대회를 성공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인원 동원이 필수인데, 준비 기간이 너무 짧고 대회원 홍보도 쉽지 않아 정말 어려운 상황이었지요. 위원장단이 수시로 모여 많은 의견을 교환했습니다. 비대위원 전체가 진정성을 가지고 똘똘 뭉쳐 병협·의학회·대전협·의대협 등을 설득했습니다. 각 직역의 동참을 끌어낸 것이 성공적인 궐기대회의 원동력이었다고 생각합니다.
□ 궐기대회 이후 대정부 협상이 시작됐지만 진척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어떤 기분이셨습니까?
비대위는 국민 건강권 수호와 의사의 정당한 권리를 지키기 위해 진정성을 갖고 협상에 임했습니다. 그러나 협상이 거듭할수록 일부 사안에만 진전이 있을 뿐 전체적인 큰 틀, 특히 비정상적인 수가의 정상화 부분에서 정부의 원론적인 태도에 많이 실망했습니다. 의료계의 기대치와 정부의 생각에는 큰 간극이 있었습니다. 정부에게도 실망했지만 무엇보다 회원들께 더 미안했습니다.
□ 정부의 무성의한 협상 태도에 대한 경고의 뜻으로 삭발을 감행하셨습니다. 당시 심경은 어떠하셨는지요?
이대로 가다가는 정부 뜻대로 일방적으로 끌려 가버릴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협상의 주도권을 회복하는 것이 절실했습니다. 국면 전환이 필요했지요. 저녁 내내 고민하다가 삭발을 결심했습니다. 가족한테 말하면 걱정할까 봐 삭발하고 집에 내려가서 보여줬는데 이미 언론 보도를 통해 다 알고 '잘 했다'며 격려해주더군요(웃음). 비대위원장 일을 하면서 식구들 걱정도 많이 끼치고 소홀한 점이 많았는데, 잘 이해해준 가족에게 고맙다는 말을 해주고 싶습니다.
□ 장외 투쟁에 적극적이었습니다. 대외 활동에 주력한 특별한 이유라도?
홍보 위주의 성명서만 남발하는 것보다는 비대위원들이 솔선수범하면서 행동으로 보여줘야 회원을 움직이고 정부를 압박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한의사 의과 의료기기 허용 법안을 추진한 김명연·인재근 의원 사무실 앞 집회, 보건복지부 서울사무소 앞 철야 시위, 청와대 앞 야간 시위, 작년 12월 10일 제1차 전국의사 총궐기대회, 올해 3월 18 전국의사 대표자 궐기대회 등 장외투쟁 때마다 많은 힘을 모아주신 회원들께 감사드립니다.
□ 의료계로선 대단히 엄중한 시기에 투쟁을 이끌며 심적 부담도 컸을 것 같습니다.
비대위에 13만 회원의 운명이 맡겨졌다는 생각, 어떤 일이 있어도 문재인 케어를 저지하고 한의사의 의과 의료기기 사용을 저지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비대위원들도 똑같은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어려울 때마다 옆에 있는 위원들이 힘을 주셨고, 민초 회원분들의 격려 전화도 큰 힘이 되었습니다.
□ 위원장을 사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 적은 없으셨나요?
있어도 말 못 합니다(웃음).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어도 어차피 회원의 권익 수호를 위해 누군가는 해야 될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기쁘게 일했습니다.
□ 비대위가 이룬 중요한 성과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문재인 케어 저지, 한의사 의과 의료기기 사용 저지라는 두 가지 수임 사항을 일정 부분 완수했다고 생각합니다. 제1차 전국의사 총궐기대회를 통해 잠자는 13만 의사 회원을 깨워냄으로써 향후 투쟁 동력의 기반을 만든 것이 큰 성과라고 생각합니다.
□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문 케어를 일방적으로 추진하는 정부에 항의하고자 작년 11월 9일 보건복지부 서울사무소 앞에서 철야 시위를 벌였습니다. 20여 명의 비대위원과 일반 회원들도 참여했었지요. 차가운 길바닥에서 앉아서 시위를 하는데 너무 추웠습니다. 앉아 있는 12시간이 120시간 같더군요. 그날 이후로 비대위는 더욱 강력한 결집력을 갖게 됐습니다.
□ 아쉬웠던 부분도 있을 것 같습니다.
비대위 활동 초기 때 협상과 투쟁에 대한 견해의 차이로 약간의 의사소통에 문제들이 있었어요. 회원들께 안타까운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요. 지속적인 소통을 통해 잘 해결됐지만, 마음이 너무 앞서 급하게 서두르다 보니 생긴 문제들이었습니다. 지금 되돌아보면 그리 큰 문제도 아니었는데 민감한 시기여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죄송하다는 말씀드리고 싶네요.
□ 겉으로 알려지지 않은 비대위 내부의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집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초반에는 투쟁과 협상에 대한 접근법, 생각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전체회의를 열면 5시간 이상 걸릴 정도로 치열한 토론이 있었습니다. 그 후 비대위원끼리 상대방에 대한 이해와 배려, 소통의 폭이 넓어지면서 의견차가 많이 해소됐습니다. 12월 10일 집회 이후로는 완전히 단합된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됐습니다.
□ 특별히 감사를 전하고 싶은 분이 계시다면?
무엇보다 비대위를 만들고 이후에도 많은 도움을 주신 임수흠 대의원회 전 의장님과 대의원 여러분이 가장 감사합니다. 또 정부와 의정실무협의체에서 회원을 위해 많은 노력을 아끼지 않으셨던 송병두 단장님을 비롯한 실무협의체 위원님들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묵묵히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함께 해준 비대위 지원팀 곽석철 팀장님과 심준기·김성진·김철욱 팀원께 비대위를 대표해 고맙다는 말을 전합니다. 정말 이 분들의 헌신적인 도움 덕분에 비대위가 성공적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비대위 행사 때마다 진행에 많은 도움을 주고 각종 집회 때 항상 함께 하신 나인수 투쟁위원님, 좌훈정 전문위원님께도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 비대위는 내려놓았지만 의협 부회장이라는 중책을 맡으셨습니다. 각오의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이필수 전 위원장은 4월 22일 의협 정기 대의원총회에서 의협 부회장에 선출됐다. 편집자 주).
대한의사협회의 가장 큰 존재 이유는 13만 회원의 권익 수호라고 생각합니다. 신임 최대집 의협회장님을 도와 집행부의 일원으로서 회원을 위해 최선을 다해 봉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