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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진기 페널티킥
청진기 페널티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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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06.04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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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헌 원장(서울 강서·정내과의원)
정경헌 원장(서울 강서·정내과의원)
정경헌 원장(서울 강서·정내과의원)

눈이 퀭하니 들어가고 부스스한 머리칼. 하룻밤 사이에 부쩍 자라버린 수염과 푸석푸석한 얼굴. 어떠한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표정과 모든 걸 던져버린 사람에게 흔히 보이는 절망의 몸짓. 그는 그렇게 호텔 창가에 앉아 있었다. 그 사진을 접한 팬들과 국민은 안타까움에 다시 한 번 몸을 떨어야했다.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는 누구인가? 

2002년 한일월드컵 8강 한국-스페인 전 승부차기에서 실축한 호아킨 선수다. 실축한 순간은 이운재 선수가 선방하는 장면으로 화면에 비춰진다. 홍명보 선수가 골을 넣고 밝게 웃으며 달리는 모습과 함께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대목이다.

승부차기와 페널티킥은 골대에서 12야드(10.97m) 떨어진 페널티마크에서 공을 찬다. 대부분 성공하기 때문에 킥에 실패하면 큰 상처가 되기도 한다. 유명 선수 중에도 폐널티킥 아픔을 갖고 있는 경우가 있다. 차범근 선수도 그 중 하나다. 그는 대표 팀 초창기에 페널티킥 실축 때문에 그 후로는 페널티골은 아예 차지 않았다. 그래서 분데스리그에서 넣은 98개의 골이 전부 필드골이었다. 만약에 페널티킥 키커로 나섰더라면 120골을 넣었을지도 모른다.

페널티킥 실패에 관해 얘기하자면 1960년대 한국축구의 대들보였던 임국찬씨를 빼놓을 수 없다. 1970년 멕시코월드컵 예선 마지막 호주와의 경기가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렸다. 우리가 이기면 재경기를 하고 재경기에서 이기면 본선에 진출하는 상황이었다. 동점 상황에서 후반 20분에 페널티킥을 얻었다. 키커는 미리 정해 놓았다. 임국찬이었다.

그는 평소에 정확한 킥으로 정평이 났던 터라 실축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임국찬의 볼은 왼쪽으로 몸을 틀다 오른쪽으로 다이빙한 골키퍼 가슴에 안기고 말았다. 관중들의 탄식과 한숨이 운동장을 고통의 도가니로 만들었다.

예선 탈락의 모든 책임을 그 혼자서 떠안아야 했다. 그 후에 그는 한동안 대표 팀을 떠났다가 복귀했고, 은퇴할 때 국민훈장까지 받았지만 페널티킥 실수에 대한 비난은 그치지 않았다. 결국 미국으로 떠났다. 힘든 생활이었지만 축구와의 인연을 끊을 수 없었다. 어린이축구교실을 운영했고, 한인 청소년 팀 감독을 맡기도 했다. 고국에 방문해 열린 친선경기는 1980년 미국으로 떠난 이후 처음이었다. 1-0으로 앞선 상황에서 페널티킥을 얻을 때였다.

"모두 나만 쳐다보더라고요. 페널티킥을 넣자 환호성이 터져 나왔는데 이렇게 쉬운 것을 32년 전에는 왜 실패했을까 생각이 들면서 괜히 눈물이 나더라고요". 

그가 짠했다. 인터넷 기사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러자 한동안 잊었던 기억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중학교 1학년 체육대회 축구경기 때였다. 내가 다닌 시골의 중학교는 6개 초등학교에서 모인 곳이었다. 그러니 각 초등학교에서 축구대표를 한 친구들이 많았고 우리 반에는 특히 많았다. 나는 초등학교 때 학교 대표로 권유받았지만, 공부를 시키고자 하는 부모님의 만류로 대표가 되지 못했다. 그래도 반을 대표해서 나설 정도는 된다고 믿었기에 우여곡절 끝에 반대표로 참가했다.  

당시 우승 후보였던 우리 반은 압도적으로 우세했지만 골은 터지지 않았다. 후반도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다행히 페널티킥을 얻었다. 주장이 키커로 나를 지목했다. 전날 연습경기에서 페널티골을 넣은 적이 있었기에 욕심이 생겼다.

나는 페널티 마크에 공을 가져다 놓고 골대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웬걸! 평소와 달리 멀게 보였고 골키퍼가 거인처럼 보였다. 공을 차려는 순간 골키퍼와 눈이 마주쳤고 멈칫하며 찬 공은 뒤땅과 함께 맞으며 골키퍼에게 안겼다. 우리 반 아이들의 탄식과 비난이 쏟아졌다. 결국 승부차기 끝에 우리 반이 졌고 경기 후 교실에서도 나에 대한 비난은 그치지 않았다. 

'초등학교 때 선수 출신도 아니면서 반장이랍시고 출전했다'는 것부터, '자신 없으면 다른 사람에게 양보해야지 잘난 체 하려고 찼다'느니, '세게 차기라도 했으면 속이라도 후련하지' 등등 다양했다. 다들 맞는 말이었다. 그래도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에 박혔다.  그 후로 나는 한동안 축구를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내가 단체를 대표해서 제대로 축구공을 만진 것은 군의관 훈련 때였다. 중대별 축구 대항 대표 팀을 선발하고서 나머지 선수 중에서 2부 팀을 뽑았는데 그 때 선수로 나섰다. 막상 그라운드에 서니 너무나 편안해서 놀라웠다. 선수들이 뛰는 게 한 눈에 들어왔고 골대 앞에서도 차분했다. 내가 골도 넣고 우리 팀이 이겼다.

어쩌다 중학교 때 같은 반 동창을 만나 그 당시 축구 얘기를 하면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그냥 그렇게 쉬운 것을 털어내지 못하고, 나 혼자 10년 넘게 상처라고 싸매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상처를 통해 따뜻한 마음이 돋아나기도 했다. 페널티킥 키커가 실패하면 나는 그를 비난하지 못한다. 안쓰럽게 느껴지는 것이 먼저가 됐으니 말이다.
'얼마나 아플까. 앞으로 또 얼마나 힘들까'

며칠 있으면 한 여름을 뜨겁게 달굴 러시아 월드컵이 시작된다. 얼마나 또 많은 사람이 페널티킥을 실패할까. 실패가 없으면 경기는 끝나지 않는 법이고 어차피 승부 세계는 냉정한 것. 피할 수 없다. 누군가는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다.

미스 샷을 하면 세 발자국 걷고서 잊는다는 타이거 우즈의 말처럼 상처를 오래 담지 않았으면 한다. 3일 동안만 아프고 털어내면 안될까. 

실패 없는 삶이 어디 있으며, 상처를 싸매고 누워있기에는 너무 짧은 인생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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