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과 함께 농촌과 함께 외길
쌍천 이영춘 박사의 삶 < 2 >
1930년 곤궁한 집안사정을 외면할 수 없어 시작한 황해도 해주에서의 개원 상황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두 달 남짓 지났지만 현실은 여전히 불투명했다.
결국 그는 황해도 평산온천 지역의 공의(公醫)를 신청하게 된다. 무의촌에서 공의로 근무하면 기본 보수가 지급됐다.
그러나 생활이 나아지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공의 보수는 전부 친가 가족에게 보내고 교사인 아내 보수와 약간의 치료비로 생활을 이어갔다.
치료비 역시 돈으로 내는 이들이 드물었다. 곡식이나 과일, 닭이나 계란, 심지어는 땔감까지 다양했다. 3년동안 공의로 지내면서 남긴 것은 초가로 된 진찰소 겸 사택 한 동과 산전 500평이 전부였다. 병원 경영이 어려웠던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았다. 가난한 이웃을 진료해주고 제대로 된 진료비를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쌍천 선생의 회고록 내용 중 한 부분이다.
"난산으로 단칸방에서 3일동안 산고를 겪던 산모를 치료하고 건강한 아이를 분만한 후 치료비 40원을 청구했습니다. 당시 그 정도의 상황에 대한 치료비용은 80∼100원이 정액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남편이 10원을 가져 와서 깎아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곤궁한 생활 가운데 치료비를 내지 못하는 이들에게 차마 제값을 다 받을 수는 없었습니다. 다른 많은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가난한 농민들에게 치료비를 까다롭게 챙기다보면 치료비 때문에 병원을 찾지 못하게 되고 그러다 목숨을 잃는 경우가 생길 것이기 때문입니다."
쌍천 선생은 가난한 농민들의 사정을 어느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치료비를 따지기보다는 너그럽게 대했다. 의사는 병을 고치는 것이지 돈을 버는 게 임무가 아니라는 사실은 이미 세브란스의전을 다닐 때부터 가슴 속에 깊이 새기고 있었다.
그는 환자를 진료하면서 늘 탐구하는 자세를 견지하며 꼼꼼히 병상일지를 기록했다. 아주 작은 것도, 잘 모르는 것도, 조금만 이상해도 모두 기록했다.
자전거를 타고 두 서너시간을 달려 왕진가는 게 일상이었던 쌍촌 선생은 평산에서 개원생활을 통해 귀한 깨달음을 얻는다. 농촌의 현실을 더 진지하고 찬찬히 바라보면서 빈곤과 무지와 질병에서 신음하는 척박한 실상을 확인한 것이다. 또 질병과 위생에 대한 무지가 가져다주는 불행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체험하고 목격했다. 이같은 깨달음은 후일 이 땅의 농민들을 위해 헌신하게 된 결정적인 동기로 작용했다.
평산에서의 공의 생활도 3년을 지나게 되면서 쌍촌 선생의 고민도 깊어졌다. 의학자로서의 뜻을 펼치다 가족을 위해 택한 개원 생활이었지만 한촌에 유배된 듯한 소외감은 어쩔 수 없었다. 세브란스의전 동기생들은 모두 미래를 일구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자신만 뒤처져 있다는 생각이 잊힐만 하면 되살아났다.
그러던 중 1933년 한 통의 편지가 그에게 전해진다. 의전 동기생으로부터 전해진 소식은 병리학교실에 조수 자리가 있으니 빠른시일내에 답장을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그의 고민을 곁에서 지켜봐온 아내의 권유와 가족들의 응원에 힘입어 3년만에 그는 다시 세브란스의전으로 돌아가게 된다. 연구에 대한 갈증 때문이었을까. 3년의 공백에도 그는 병리학교실 조수의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그가 바라던 공부였기에 연구와 실험의 과정 한 순간 한 순간이 즐거움 속에 지나갔다.
그 뿐이 아니었다. 평산에서 지낸 3년 동안 환자와 그리고 질병과 마주한 시간들은 그의 공부에 큰 도움을 주었다. 의학 이론이나 실험 등이 환자와의 연관성 속에서 의학적 결실을 이뤄나가는 희열을 느낄 수 있었다.
허송세월이라 느꼈던 시간들은 그를 성장시켰고, 학생들에게도 가르칠 때도 의학이론에다 실험실이나 연구실 밖 실제 임상경험을 녹여내 내실있는 교육을 이끌어갈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습성늑막염은 그에게 절망으로 다가왔지만, 의사로의 길을 인도했고 환자나 농촌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갖는 소중한 계기를 만들어 줬다.
그렇게 일년 반 정도의 열정적인 시간이 흘러갔다. 그즈음 학생들을 가르치고 연구에 대한 열정을 토해내던 그에게 또 다른 도전이 시작되고 있었다.
평양고보 시절 은사였던 와타나베 선생과의 인연은 계속 이어졌다. 와타나베 선생은 그가 성천군 별창보통학교에서 대구보통학교로 전근했을 때 대구사범학교 교장으로 부임했고, 그 후 영전을 거듭해 당시 경성제국대학 교수로 재직중이었다.
간간히 편지를 나누던 와타나베 선생의 갑작스런 전화는 그를 새로운 고민에 빠지게 했다.
당시 군산·김제·정읍 지역을 중심으로 운영된 구마모토 농장의 소작인을 위한 진료소를 맡아달라는 부탁이었다. 구마모토 농장의 규모는 1시 5군 26개면 3500정보(1000여만평)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으로 소작인은 3000세대 2만여명에 달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그는 생각은 혼란스러웠다. 먼저 고통스럽던 평산의 기억이 떠올랐고, 아이들의 교육도 걱정거리였다. 농장주의 의도도 소작인들의 건강보다는 농장 경영에 더 큰 의미를 두고 있을 게 불보듯 했다. 이미 내려진 세브란스의전 연구실 조수 겸 병리학 강사 발령도 그의 결정을 어렵게 했다. 세브란스의전의 교수로서 학문적 성과를 이뤄낼 수 있는 보장된 길이었기에 더 그랬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조금씩 움직였다. 농촌의 보건위생과 예방 등에 대해 뜻을 펼칠 수 있는 최적의 기회라는 자각이었다. 비록 부귀나 명예가 아닌 봉사와 희생의 길이겠지만 많은 사람을 살리고 도울 수 있는 길이었다.
1935년 1월. 전라북도 옥구군 개정농장에는 인근 2만여명의 소작인들을 위한 '자혜진료소'가 현판을 내걸었다. 쌍촌 선생은 이날부터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개정에 머무르며 농민들의 보건위생과 진전된 삶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
그해 6월에는 그가 연구해온 의학적 성과를 인정받는 의미있는 일도 있었다. 자혜진료소로 내려오기전까지 몰두한 연구가 있었다. 논문 제목은 '니코틴이 성호르몬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였다. 그의 스승인 윤일선 박사는 쌍천 선생의 연구결과를 일본의 교토제국대학에 박사학위 논문으로 제출했다. 교토제국대학은 논문심사위원 만장일치로 박사학회 논문으로 결정했다. 조선인 교수의 지도로 일궈낸 첫 개가였다. 당시 동아일보 기사 한 구절이다.
"오르고 또 오르면 제 아무리 높은 뫼라도 구경에는 오를 수 있다."
이렇게 시작된 기사는 세브란스의전을 수석 졸업한 쌍천 선생이 일본 교토대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는 내용이었다. 조선인 교수 밑에서 연구한 순수한 국내 박사 탄생으로 조선민족의 우수성을 드높였다고 칭송했다.
진료소에는 소작인들이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개정진료소에서는 일주일에 다섯 번 지료하고, 대야·지경·화호·상관 등 지역에는 장날을 이용해 닷새에 한 번씩 순회진료를 실시했다.
진료중에는 '기생충·결핵·성병'을 '민족을 망치는 3가지 독한 병'으로 꼽고 예방과 퇴치에 열과 성을 다했다. 이 세가지 질병의 위험성을 널리 계몽하고, 예방법을 알리기에 힘썼다. 어린 나이부터 질병 예방의 중요성을 알려주기 위해 보통학교 학생을 대상으로 보건과 위생의 필요성을 가르쳤고, 틈나는대로 예방의학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바쁜 진료일정 가운데 의학적 지식과 경험을 되짚으며 소작인들의 보건위생을 위해 할 일을 정했다.
가장 우선되는 것은 농촌 위생이었다. 결핵·성병·기생충·영양상태·유아 사인 및 사망률·모성 위생·환경위생 등의 기초조사와 건강 상담을 진행했다. 이어 조사와 연구지도를 통한 학교 위생 점검과 각종 조사를 수행할 보건요원 확충을 이어갔다.
쌍천 선생이 가슴속에 차곡차곡 쌓아둔 농민들의 건강한 삶을 위한 구체적 실행계획은 이제 하나씩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