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법원 "특정 개인 알아볼 수 없으면 법 위반 아냐" 판단
"발표 통한 의학 발전·의료사고 방지 등 필요성 고려해야"
의료진이 환자의 동의를 받지 않았더라도 수술 영상을 비롯한 진료기록을 학회 증례 보고에 사용하더라도 개인을 특정할 수 없다면 개인정보 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법원 판결이 나왔다.
서울고등법원 제9민사부는 최근 척삭종 재발로 수술을 받은 A씨가 사망하자 유가족이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의료과실을 인정하지 않고, 다만 설명의무를 위반했다고 판단, 모든 사항에 대해 무죄로 판단한 1심 판결 중 일부를 뒤집었다.
척삭종은 태생기에 존재하는 척삭이 생후에도 남아 뇌와 척수 모든 부위에 호발하는 종양으로 적출해도 재발률이 높아 완치가 어려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소송에서 A씨의 유가족은 "의료진이 사망한 환자의 수술 영상을 학술대회에서 발표했다"며 '업무상 비밀누설로 인한 불법행위'에 대해서도 배상하라고 요구했다.
서울고등법원은 의료법에 따른 환자 비밀 누설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본 1심 판결에 무게를 실었다.
A씨는 1997년 K병원에서 척삭종(뇌기저부 종양)을 진단받았다. 경추 제1번 부위에 대한 척삭종 절제술 및 방사선 치료를 받았다. 하지만 수술 7년 만인 2004년 척삭종이 재발했다. S병원에서 2차례의 절제술을 받았고, 2004년과 2006년 방사선 치료를 진행했다.
척삭종은 이후에도 계속 재발, 2007년 3월 S병원에서 종양 절제술 및 방사선치료를 받았다.
2008년 2월 28일 수술 받은 부위에 척삭종이 재발했다. B병원 의료진은 척추후궁 절제술 및 성형술을 통해 경막 내 척삭종 제거 수술을 시행했다.
A씨는 수술 후 재활 치료를 받던 중 2008년 5월 20일 후유증이 발생했다. B병원 응급실에 입원, 진료 및 검사를 받았으나 사지마비 상태에 이르렀다. 2008년 8월 25일 재활의학과로 전과해 재활치료를 받았으며, 2012년 7월경부터 시력 및 청력 이상을 호소했다.
A씨는 2012년 12월 18일 C병원으로 전원, MRI 촬영을 비롯한 정밀검사에서 척삭종이 다른 뇌기저부까지 침범, 시신경을 압박할 정도로 악화됐음을 확인했다. C병원 의료진은 척삭종 제거 수술을 시행했으나 수술 과정에서 급성 뇌지주막하 출혈과 뇌경색 소견이 확인됐다.
이후 뇌사 상태에 빠진 A씨는 2013년 1월 16일 뇌경색 등으로 인한 중증 뇌간 부전으로 심기능이 정지, 사망했다.
A씨의 유가족들은 B병원과 C병원을 상대로 ▲치료방법 선택 상의 과실 ▲수술상의 과실 ▲설명의무 위반 ▲치료지연 과실 ▲업무상 비밀누설로 인한 불법행위 ▲의료진의 수술 동영상 미교부 등을 주장하며 소송을 제기했다.
서울동부지방법원과 항소심(서울고등법원) 모두 의료진이 주의의무를 위반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유족들의 의사에 반해 망인에 대한 수술자료를 학술대회에서 발표하는 등 외부에 공개함으로써 환자 및 유족들의 사생활 비밀과 자유, 개인정보 자기 결정권 및 비밀유지권한을 침해했다는 주장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학술연구가 필요한 경우로서 특정 개인을 알아볼 수 없는 형태로 개인정보를 제공하는 경우 그것이 정보 주체 또는 제3자의 이익을 부당하게 침해할 우려가 있을 때를 제외하고 개인정보를 목적 외의 용도로 이용하거나 이를 제3자에게 제공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규정한 개인정보 보호법 제18조 제2항 제4호를 들었다.
서울동부지방법원 제13민사부는 "개인정보 보호법 제2조 제1호에서 말하는 개인정보란 다른 정보와의 결합 등을 통해 개인을 알아볼 수 있는 경우로 한정된다"며 "의학지식 발전과 유사사례에서의 의료사고 방지를 위한 증례 보고의 중요성을 부인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재판부는 "단순히 특정 환자에 대한 진단이나 수술 관련 자료라는 사정만으로 그 자료가 의료법에서 정하는 의료인의 비밀 누설 행위의 '비밀'이라고 보기 어렵다"면서 "의료인들만 참여하는 학술발표 과정에서 환자와 관련된 기록으로서 환자의 개인정보가 포함되지 아니한 자료를 활용하여 보고를 진행한 것이 그 환자의 이익을 부당하게 침해하여 그의 개인정보 자기 결정권을 침해하는 처사라거나 환자에 관한 비밀을 누설하는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항소심 재판부는 설명의무를 위반하지 않았다고 판단한 1심과 달리 "수술 전 A씨의 동생에게 수술의 위험성을 설명하고 수술동의서에 서명을 받았지만 환자 본인이 서명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아무런 기록이 없다"면서 위자료 20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마취동의서에는 동생이 A씨 대신 서명하는 사유를 적었지만 수술동의서에서는 서명만 했을 뿐 아무런 사유를 적지 않은 점을 짚었다.
항소심 재판부는 ▲사망한 환자가 사지 마비 상태였지만 의식은 명료했던 점 ▲환자가 충분한 설명을 듣고 자기 결정권을 행사했으며 서명만 유가족에게 하게 했다는 증거가 없다는 점 ▲해당 수술이 설명의무를 생략할 정도로 위급한 응급수술이라고 볼 수 없는 점 ▲서명인이 사망환자의 법정대리인이 아니라는 점 ▲해당 수술에 대한 다른 병원의 의견이 달랐고 사망의 위험성이 다른 척상종 환자에 비해 높았던 점 ▲환자 및 유가족이 내원 전에 해당 수술의 위험성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었다고 볼 만한 증거가 없다는 점 등을 들어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한편, 이번 사건은 유족 측과 의료진 모두 판결에 불복, 대법원에 상고한 상태로 최종 판결을 남겨놓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