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헌 원장(서울 강서·정내과의원)
우리 의사들은 어떤 의사를 좋아할까? 맛있는 밥을 잘 사는 의사? 술값을 잘 내는 의사? 사교성이 좋은 의사? 이렇게 답을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사실 저는 이런 답을 기대한 것은 아닙니다. 의사가 환자가 된다면 어떤 의사가 마음에 들겠는가를 묻고 싶었던 것입니다.
혹시라도 지금까지 이런 설문지를 받아본 분이 계실까요? 저는 아직까지 이것과 비슷한 설문지도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생각해 보면 만약에 이런 설문을 하고 분석할 때 신뢰할 만한 결과가 나올지도 의문입니다.
설문에 대한 정확한 통계를 내려면 의사인 본인이 환자가 돼 진료를 받거나 검진받은 경우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경우가 많지 않으니 표본이 적어서 통계를 내기가 쉽지 않겠지요.
그래도 설문을 꼭 하고 싶다면 외연을 좀 더 넓혀 질문을 좀 더 편하게 바꿀 수는 있을 겁니다. 본인이 환자가 된다면 어떤 의사에게 갈 것인가? 라고 질문하거나, 또 보호자로서 진료에 참여했을 때 마음에 드는 의사가 어떤 분이었는지 묻는다면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도 있을 겁니다.
의사의 외모나 행동에 대해 구체적으로 묘사하면서 실력이나 인간성에 대해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의 얘기를 듣고 평가할 수도 있을 거고요. 예를 들어 의사 가운의 소매 끝이 더러운 것으로 보아 소탈한 사람일 거라든지, 목소리가 너무 작은 것으로 보아 조심성이 많다느니, 별 것도 아닌 일로 버럭 화를 내기는 하지만 마음은 따뜻한 사람일 거라는 식의 시시콜콜한 얘기들 말입니다.
요즘에는 환자나 보호자가 의사와의 대화를 녹취하는 경우도 있기에 녹취 내용을 듣고서 그 의사를 평가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녹취 중에는 유명한 교수님 얘기라 한마디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한 것이 대부분입니다. 학회 때 열심히 듣는 사람이 녹화나 녹취하는 것과 비슷한 마음이겠지요. 녹취된 내용 중에 이해되지 못한 것을 내게 묻기 위해 준비했다는 열성적인 환자도 있습니다. 이런 정도는 애교에 속하겠지요.
반면에 의사와 다툰 것을 녹취해서 내게 자기 편에 서줄 것을 요구한 환자도 있습니다. 어쨌든 내가 환자가 된다면 우리는 직접 경험하지 않더라도 어떤 의사에게 내 몸을 맡기고 싶을지 판단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기는 합니다.
의사가 좋아하는 의사에 관한 통계는 갖고 있지 않으니 우선 제가 좋아하는 의사를 얘기해 보겠습니다. 아무래도 그 얘기는 둘로 구분하는 게 좋겠어요. 간단한 질환을 치료하기 위해서나 검진받기 위해 개인 의원에서 만난 의사와 생명과 직결된 상황에서 만난 종합병원 의사로 말이죠.
개인 의원 의사는 목소리가 조금 크고 밝은 표정이면 좋겠고, 나와 눈을 마주쳐도 서로 편하게 웃거나 눈웃음이나 미소가 보이면 좋겠습니다.
내가 의사이기에 당연히 알거라고 생각해 설명을 생략하기 보다는 내가 착각하거나 간과할 부분이 행여 있을까봐 자세히 설명해주는 게 좋더라고요. 당연히 알 것도 내가 모르면 그 또한 스트레스가 될까봐 걱정되기 때문이기도 하고요.
종합병원 의사는 솔직하게 얘기해주고 함께 상의하는 의사가 좋을 것 같아요. 목소리는 차분하면서도 안정감이 있으면 더 좋겠고, 얘기하는 게 가볍지 않아야 되겠지만 가벼운 유머도 잘 어울리는 분이면 좋겠어요. 말은 길지 않고 언뜻 건조해 보이지만 행간에서 느껴지는 원숙함이 보이면 좋겠습니다. 눈빛이나 표정에서 모든 게 읽혀지는 맑은 분이면 더 좋겠습니다. 중요한 결정을 앞 둔 상황에서는 환자와 보호자에게 미리 알려주어 후회 없는 선택을 하도록 해주면 좋겠어요. 충분히 생각하고 어렵게 결정한 환자의 뜻을 일단 들어주는 정도의 예의는 갖춰주면 더욱 좋겠습니다.
흐름출판에서 2016년에 출판한 <숨결이 바람 될 때>는 의사인 폴 칼라니티가 쓴 책입니다. 그는 서른 여섯 젊은 나이에 폐암에 걸려 어린 딸과 의사인 부인을 남기고 떠난 신경외과 7년 차 전공의였습니다. 이 책에는 폴 칼라니티 치료에 동참하는 아내를 비롯한 의사들이 많이 나옵니다. 비교적 자세히 묘사되는 그 의사들의 특징은 한마디로 솔직하고 담백하게 대화한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들은 현재 상황을 있는 그대로 알리고 상의하되 어떻게 전달할지를 고민합니다. 잠시 뜸을 들이기도 하고 때론 침묵하기도 하고 표정이나 눈빛으로 얘기하고 손을 꼬옥 잡아주거나 어깨를 두들겨 주는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더군요. 대화를 뒤도 미루거나 빠져나가고 싶어 하지 않고, 정면으로 부딪히되 환자만큼 내 마음도 아프고 힘들다는 느낌을 보여주더군요.
물론 동료이기도 하고 너무나 안타까운 상황, 그리고 미국의 진료 시간과 진료비 등을 감안해서 들어야겠지요.
다시 설문지 얘기로 돌아가 얘기하지면, '의사가 좋아하는 의사에 관한 설문'은 별 의미가 없어 보입니다. 보통의 환자가 좋아하는 의사와 의사가 좋아하는 의사는 차이가 없을 것 같거든요. 모든 감각을 일깨워 의사의 말과 표정과 행동에 집중하는 환자나 보호자는 의사의 마음까지 파악하고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만약에 선생님이 짜증을 내고 심지어 화를 내고 다른 병원으로 가라고 쫓아내도 절대로 떠나지 않는 환자가 있다면, 그것은 그 환자가 믿을 사람은 선생님 밖에 없어서 일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선생님이 마음 약한 분인지 알고서 화를 냈어도 다시 받아주는 분이란 것까지 알고 계시는 것일지도 모르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