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은주 서울의대 교수(분당서울대병원 재활의학과)
나는 기억한다. 커다란 전지를 마루에 넓게 펴놓고 가족 신문을 만들었던 방학 마지막 날을, 사분의 일로 나누어서 아빠·엄마·동생, 내가 각각 자기 면을 만들어 채워야 했다.
나는 기억한다. 처음 신문에 기고했던 글의 제목을, 내가 가장 사랑하는 'My favorite Love'였다. 초등학교 4학년 봄이었다. 아버지의 고등학교 동창회보 첫 면의 글이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아버지에 대해 쓴 소녀의 글이었다. 몇 년 동안은 그 회보 글을 스크랩해 보관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나는 기억한다. 김소월이 여류 시인인 줄 알았다고 고백한 아버지를 어머니와 함께 한참 동안 놀렸다.
나는 기억한다. 우리 집 책장에 아주 오래된 옛날 시집들을, 세로 쓰기여서 오른쪽에서 읽어나가는 낡은 책이 여러 권 남아 있었다. 노천명의 사슴이란 시가 좋았다. 그 시집들은 어머니가 결혼하면서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오면서, 결혼하면 할 일이 별로 없을 거라며 책이라도 읽을 생각에 왕창 짐으로 가져온 책들 중 일부였다.
나는 기억한다. 나무로 꽃과 새 그림이 부조로 조각된 거실장 안에 보관돼 있던 편지 다발을, 부모님이 결혼하시기 전 연애하던 때 서로 주고 받았던 빛이 바래 누런 색을 띈 종이들을, 편지의 마지막은 '당신의 독수리로부터', '당신의 비둘기가'로 끝났다. 부러웠다.
나는 기억한다. 중학교 일학년 때 집 앞 상가 3층에 있는 독서실의 조그만 칸막이 책상을. 가고 싶다고 한참 졸라서 들어간 자리에서 제인에어 두꺼운 책을 읽고 엎드려 잤던 시간들을. 꿈속에 제인에어가 나타나서 놀라 일어났다.
나는 기억한다. 중학교 3학년 졸업을 하는 겨울 방학, 학교 앞 있던 서점에서 친구를 만나 함께 담임 선생님을 찾아가 레스토랑에서 돈까스와 스프를 먹었던 눈 오는 날 거리를. 친구는 나에게 독일인의 사랑이라는 책을 선물했다. 아니, 내가 주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기억한다. 고 3년 내내 한 달에 한 번꼴로 주고 받았던 편지들을, 정자체로 쓰여진 편지에는 늘 명언 한 마디 적혀 있곤 했다. "눈물 젖은 빵을 맛보지 않은 자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는 괴테의 구절은 가슴을 울렸다. 고등학교 공부하기 한참 싫었던 날은 편지를 쓰고 읽었다.
나는 기억한다. 꽃 포장하는 집 앞 가게를, 무슨 일이 있으면 달려가 연보라색 장미 한 송이, 국화 한 다발, 비싼 꽃은 아주 조금 사도 각종 예쁜 색지로 포장해주는 꽃집 언니를, 마술사 같았다.
나는 기억한다. 나의 꽃을 코스모스로 정하고는 코스모스 꽃말을 찾아보았다. 순정이었다. 코스모스 관련된 시들을 모조리 찾아 읽었다. 가장 좋아하는 코스모스 제목의 시는 정연복 시였다. '내 인생의 팔 할쯤은 바람이다'라는 구절로 시작됐다.
나는 기억한다. 싸이월드에 시 한편을 음악과 함께 올려 두며 누군가 읽어 주길 기대했다. 주로 이해인 시였다. 나무·새· 하늘·좋아하는 시어와 이해인 키워드를 올려 찾은 시들을 무작위로 적었다. 해질녘의 단상이라는 시가 한동안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나는 기억한다. 출퇴근 길에 늘 이용하는 지하철 승강장 스크린 도어에 쓰여진 시를 처음 발견했을 때 놀람을. 지하철 각 역마다 다르게 적힌 시를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걷고 읽으며 열차를 기다리는 기쁨을. 시와 유리에 비쳐 사진을 찍고 있는 내 모습을 함께 아이폰 사진으로 찍어 페이스북에 올리며 하루를 마무리했던 시간을. 가장 기억에 남는 시는 양재역에 적힌 기형도 시인의 '빈집'이었다. 기형도의 일생을 찾아 읽곤 가만히 눈물지었다.
나는 기억한다. 논문을 쓸 때는 논리가 맞지 않고 비약이 너무 심한데, 글은 의외로 괜찮다고 했던 선생님의 말을, 놀리는 말인지 칭찬의 말인지 아직도 모르겠다.
나는 기억한다. 어느 가을 언덕에 들국화가 흐드러지게 피었다. 꽃다발을 만들어 빨간 색 리본으로 묶어 선물로 건네고 찍어준 사진을.
나는 기억한다. 추운 겨울 러시아 에르미타주 미술관을 다녀오신 아버지가 돌돌 말아 큰 여행 가방에 넣어오신 그림을. 램프란트의 '돌아온 탕자'였다. 이층으로 올라가는 문 앞에 몇 년간 색이 변할 때까지 붙어 있었다. 아들을 서서 품에 안아주는 손 하나는 어머니의 손, 하나는 아버지의 손이라는 설명을 듣고 한참 찾아보았다. 정말 틀린지 아닌지.
나는 기억한다. 대학 시절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공간은 윤동주 시비가 놓여진 작은 언덕이었다. 싸온 도시락을 둥그런 나무 탁자에 올려 두고는 높게 뻗은 나무들 사이에 보이는 하늘 한 번 쳐다보고, 까만 돌 위에 새겨진 서시 한번 읽었다. 늘 혼자였다.
나는 기억한다. 예과 시절 여학생회의 주된 사업은 매주 재활병원 환자들과 함께 연 작은 노래방 교실이었다. 환자들의 신청곡을 전자 오르간으로 반주하고 함께 노래했다. 난 그 때 뽕짝 풍에 맞춰 옛 가요 반주법을 배웠다. '보리밭'은 아직도 악보를 외울 수 있다. 아버지의 십팔번 곡이었다.
나는 기억한다. 대학교 일학년 처음 미국에서 한 아이쇼핑의 즐거움을, 나인웨스트에서는 250cm나 되는 큰발에 맞는 예쁜 구두가 있었다. 동명의 아줌마는 진리 안의 자유가 무슨 의미인지 쇼핑을 통해 가르쳐주셨다.
나는 기억한다. 1996년 찬란했던 봄을, 길가에 피어난 제비꽃을 커다란 책갈피 사이에 말려 모양이 잡히면 연보라색 한지에 붙여 작은 쪽지를 만들어 좋아하는 시·글 구절을 적어 선물했다. 물에 닿으면 수채화처럼 색이 번지는 색연필로 꽃·새·나무 그림을 그리곤 했다. 물론 누군가에게 보여줄 정도의 수준이 아니었지만 그냥 좋았다.
나는 기억한다. 2000년 여름이었다. 난 본과 3학년이었고 학교 수업이 없었다. 친구 두 명과 함께 2층 침대가 놓여진 기숙사 방에 날마다 만났다. 의약분업이라는 심각한 상황에 친구들이 고민하며 다양한 의견을 내 놓을 때, 난 딴 생각을 했다. 젊었고, 여름이었고, 남자친구가 없었다. 환상과 상징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그 중 한 친구는 아직도 아프리카 케냐에서 메타포 가득찬 문자를 보낸다.
나는 기억한다. 의대를 졸업하던 날 멋진 졸업모와 가운을 수백명이 입고는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했던 날을. 기대처럼 감동적이지 않았고 지루했다. 현재로 실재하게 된 미래는 늘 실망이다. 히포크라테스 선서가 적힌 청동으로 만든 것 같은 무거운 기념품은 아직 우리집 서재에 비스듬히 세워져 있다.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다.
나는 기억한다. 상처입은 치유자라는 책 제목을. 내용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Wounded Healer'라는 역설적인 제목이 왠지 그동안 힘들었던 과거들은 모두 좋은 의사가 되기 위한 자산인 것 같았다.
나는 기억한다. 인터넷으로 보았던 선명한 붉은 색이 아닌, 짙은 갈색, 녹슨 철 같은 사라져가는 색으로 표현된 로스코 그림을. 리움 미술관에서 처음 보았을 때 울적함과 쓸쓸함이 쏟아졌다. 곁에 있으면 따뜻하게 안아주고 싶은 외로운 화가였다.
나는 기억한다. 비오는 날, 빛이 나지 않는 우중충한 날의 나무 초록색은 더 선명하다는 것을, 산등성이의 나뭇가지들은 섬세히 보인다는 것을.
나는 기억한다. 2018년 가을을.
눈이 와도, 비가 와도 12월이 되도록 떨어지지 않는 빛깔 고운 단풍이 가는 모든 곳을 채웠던 시간을. 그 더운 여름의 무더위를 지나, 예고 없이 갑자기 추워져 졌던 초가을을 지나서, 때늦은 평년의 아름다움으로 찾아온 계절을.
이렇게 시간이 지나면 나무들은 빨갛고 노랗게 물들어 변하며 익어간다는 운명을 알려준 가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