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언휘 원장(대구 수성·박언휘종합내과의원/한국노화방지연구소 이사장)
첫 눈이 온 까닭일까. 오늘 아침은 유난히도 바람이 불고 햇살은 먹구름으로 가리워진 날이다. 어제는 뜬 눈으로 긴 밤을 지새웠다. 시뻘겋게 핏발이 선 두 눈을 눈물이 나도록 비벼도 보았다. 하지만 아직도 초등학교 동창 친구 K의 죽음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K는 지난해 연말부터 한 달에 두 번씩 서울에서 우리병원이 있는 대구까지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때론 거센 폭풍과 바람이 불어도 단 한번도 빠짐없이 진료를 받으러 왔다. 고혈압·당뇨·만성 비형간염·위궤양 그리고 신부전까지…. 그리 늙지도 않은 나이에 K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의사인 나도 믿기어려울 만큼 여러 가지 질병을 앓고 있었다.
"어떻게 이렇게 먼곳까지 왔니?"라는 우문(?)에 "명의라서…?"라는 현답(?)을 듣고, 사실 나는 책임감마저 느끼며 진료했다. 6개월 뒤인 며칠 전의 어느날이었다. 그 날도 먹구름이 끼고 하루종일 바람이 몹시 불던 날이었다. 그동안 차 한 잔 같이 못했으니 그 날은 꼭 함께 저녁식사를 해야겠다는 친구에게 다음 주로 미루자고 했다.
당시 나는 이런저런 일로 많이 지쳐 있었고 결국 K 앞에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런 나를 물끄러미 지켜보던 K는 2주 후에 다시오겠다며 손을 흔들고 떠났다.
K는 유난히도 착하고 선량한 기업인이었다. 꼭 나를 먼저 배웅해야겠다며 웃던 K는 그날 이무런 예고도 없이 이제 다시는 볼 수 없는 먼 나라로 떠나버렸다.
오늘 이 시간을 살기 위해 자신에게 남아있는 모든 힘을 다해 병마와 싸우는 사람도 있지만, 한편 이렇게 무모하게 자살을 하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는 게 쉽지 않은 하루다.
요즘 유난히 눈에 띄는 TV 자막은 자살이다. 청렴을 옷처럼 걸치고 살았다던 모 장군 출신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몇년 전에는 미모의 한 여성 아나운서가 이불을 뒤집어 쓰고 고층 빌딩에서 뛰어내렸다. 자살을 하면서도, 외롭고 무서웠는지도 모를 일이다. 얼마 전에는 충청도의 70대 노부부가 동반자살을 했다. 어제는 공부 잘하던 내 친구의 외동 아들이 수능을 앞두고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렸다. 열심히 돈만 벌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는 기대로 하루가 24시간이라는 것이 안타깝다며 열심히 살던 부모를 둔 학생이었다. 가슴에 묻어둘 아들 생각으로 너무 마음이 아파서 울지도 못하던 여고 동창생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아른거린다.
올해 나온 '사망 및 사망원인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자살자 수는 연간 1만 3092명으로 하루 평균 36여명에 이른다.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2007년 조사에서 OECD 국가 중 1위를 기록했다.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2008년 전체 사망 원인 중 자살이 5.22%를 차지했으며, 2009년에는 2008년보다 18.8% 증가했다. 지난 해여름에는 30대 남성이 일가족 4명과 자살을 시도 한 적도 있다. IMF 때보다는 덜해도 우리 사회에서는 여전히 여러 형태의 자살이 줄어들지 않고 있다.
왜 사람들은 극단적인 방법을 택할까?
생활고에 빠진 이들의 일가족 자살 이면에는 의지할 데라곤 아무도 없는 진공 상태에 빠진 이들의 '자포자기적 심리' 때문이리라.
자살을 예찬하던 쇼펜하우어는 그 원인을 첫째는 삶의 무의미함, 둘째는 사랑의 실패, 셋째는 경제적인 이유로 분류했다.
자살은 갑자기 이뤄지는 것이 결코 아니다. 자살하려는 사람은 살고 싶다는 욕구와 죽고 싶다는 욕구 사이에서 갈등한다. 희망 없는 자신을 죽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 다른 사람을 죽이기도 한다. 자살의 시그널은 죽고 싶다는 욕구가 아니라 어쩌면 '진짜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욕망의 표현이다.
사실 필자도 대학시절 아버지의 사업 실패 후, 먹을 것이라곤 쌀 한 톨 없는 상태로 휴학하게 되면서 희망의 벼랑 끝에 서게 됐다. 크리스마스 이브 날 모든 사람들은 행복감에 젖어 있을 때, 내 생명에 대한 특권을 남용하면서 아무도 모르게 죽음의 문턱에 섰다.
춥고 배고프고 절망에 빠진 이들은 다른 사람들이 배부르고 행복할 때, 극심한 상대적 불행과 절망에 빠지게 된다. 살면서 누구나 한 번 쯤은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 '절망의 병'인 자살을 막을 수는 없을까?
지금 나는 덤으로 인생을 살고 있다. 어려운 일이 닥치면 늘 "그래, 사람도 죽고 사는데. 이 정도쯤이야…" "살아 있다는 것에 그저 감사하자!"라고 마음속으로 외친다. 그저 살아 있음에 감사하고 행복할 뿐이다.
심한 우울증 환자들이나 정신질환자들은 병의 상태가 호전될 때 오히려 자살 비율이 높아진다. 그래서 가족의 관심이 줄어드는 병의 호전시기에 더 큰 관심이 필요하다. 그러나 자살자 중 정신질환자의 비율은 전체 자살자 중 10% 안팎에 머무른다. 최근에는 노인 자살률도 크게 증가하고 있다. 특히 60∼70대 노인 자살이 증가하고 있다. 가난과 외로움 속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노인들이 급증하고 있다. 주위를 둘러보고 그 분들에게 작은 사랑이라도 보내드려야 하는 이유다.
하지만, 젊은이들의 자살 유형은 다르다. 때로는 명예를 위해, 죄책감에 빠져서, 종교적인 이유로, 사랑의 실패 등이 이유지만 결국은 자신의 '행복'과 관련된 정체성의 문제다.
행복을 느끼며 멋지게 살아가는 정도를 행복지수라고 한다. 국민소득이 높은 국가일수록 비례해서 높을 것 같지만 안타깝게도 '행복지수'는 국민소득과 반비례한다. 후진국은 선진국에 비해 자살률이 낮다. '행복감'은 어쩌면 많은 부분에서 상대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자살을 예찬하던 쇼펜하우어는 '죽음의 병' 콜레라가 유행할 때 살기 위해 그 도시를 떠났다. 죽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 그의 '의지와 표상으로의 세계'를 읽으면 갑자기 죽고 싶다는 생각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자살을 예찬했지만 죽고 난 후의 '무(無)'의 상태를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정체성 상실과, 소외감, 극단적인 절망, 희망이 없으니까 자살할 수밖에 없는 이들에게 관심과 사랑으로 희망을 전달하는 희망배달부가 되지 않으실래요?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일 중의 하나가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것일진데 이 차가운 겨울을 보내며 다가오는 희망의 봄에는 모두가 파란 사랑을 전달하는 아름다운 생명의 배달부가 되지 않으실래요?
자신을 사랑하고 또 남을 사랑하는 진정한 사랑의 감정. 그냥 사랑한다는 사람이 살아 있다는 기쁨만으로 살아갈 수 있는 진짜 사랑을 해보시지 않으실래요?
비록 지나간 사랑이라도 "그래,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 내 탓도 네 탓도 아닌 "사랑할 수 있음에 행복했노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 우리가 되지 않으실래요?
가질수 없는 것을 탓하지 말고, 작은 것이라도 가진 것에 감사하며, 비록 나눌 수 있는 빵은 없더라도 나눌 수 있는 작은 사랑이 있음에 행복할 수 있기를…. 그럴 때 세상은 변화되고 이 세상은 아름답고 멋진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곳이 된다.
깨끗이 치운 자동차 안에서 조용히 배출되던 연탄가스에 취해 떠난 K가 생각나는 이시간. 함께 하지못한 저녁식사가 너무 아쉽지만, 아직도 그가 가져다 준 중국산 보이차와 여러 환자들이 보내준 각종 선물 꾸러미로 지저분해지기까지 한 진료실이 오히려 안도와 평안함마저 주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내 머릿속 기억은 흩어질지라도 가슴속을 헤집고 새겨진 트라우마는 오랫동안 치유되기 힘드리라.
그토록 아픈 맘을 헤아려 주지 못한 K에게 못난 친구가 전한다.
"친구야, 미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