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프링클러 미설치 병원 1066곳...보건복지부 488곳 85억 원만 지원
기획재정부 1148억 원 전액 삭감...의협, 소급적용 10년 유예 요청
정부가 면적 600㎡이상에 30병상 이상 입원실을 갖춘 병원엔 '스프링클러'를, 600㎡ 미만 병원과 입원실이 있는 의원급에 '(간이)스프링클러'를 설치토록 한 '화재 예방, 소방시설 설치·유지 및 안전관리에 관한 법률 시행령 일부 개정령(화재소방법)'에 이어 기존 의료기관까지 3년 이내에 스프링클러를 설치토록 소급적용하는 방안을 추진하자 의료계와 병원계의 불만이 커지고 있다.
소방청은 지난해 6월 27일 입원실을 갖춘 의료기관에 대한 소방시설 설치를 강화하는 내용을 담은 화재소방법 시행령 일부 개정령(안)을 입법 예고했다.
대한의사협회는 환자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기 위한 시행령 개정안의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중소규모의 영세한 병·의원의 사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행정적으로만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라며 반대 의견을 냈다.
의료기관의 약 30~40%는 임차해서 운영하는 형태다.
스프링클러를 설치하기 위해서는 수압계, 배관, 비상 전원, 배수구 설치 등 건축물 공사를 해야 하므로 수억 원의 비용을 투입해야 한다. 특히 건물주인 임대인이 건축물 공사를 허락하지 않을 경우엔 병원 문을 닫을 수밖에 없다.
스프링클러를 설비했다 하더라도 추후 계약관계 종료 후 원상 복구를 해야 하거나 의료기관 이전 시 재설치 비용을 추가로 부담해야 하는 문제도 발생할 수 있다.
건물이 노후된 경우 스프링클러 설치로 인해 건물의 안전성에도 문제가 발생할 수 있고, 소방시설 공사를 위해 휴진을 해야 하므로 진료를 하지 못해 발생하는 손실과 입원환자 퇴원 조치 등에 따른 불편과 건강상 악화도 우려된다.
심지어 공사를 위해 환자를 다른 병원으로 전원할 경우에도 입·퇴원 및 전원을 위한 행정절차, 환자 집단 후송대책, 각종 의료비용, 환자 및 보호자의 불편, 의료기관의 업무손실, 퇴원 후 재입원에 대한 사회적 비용 등도 무시할 수 없다.
시행령 개정안에는 방염처리 실내장식물 설치 및 대상 물품 기준 강화의 경우 이미 설치된 실내장식과 물품을 교체하라고 규정하고 있어 이 또한 과도한 행정부담이 되고 있다.
무엇보다 의료기관이 스프링클러 등 소방시설을 설치한다고 해도 같은 건물의 타 업종이 소방시설을 설치하지 않는다면 타 업종 시설에서 화재가 발생할 경우 소방시설 설치 효과는 무용지물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의협은 입법 예고 당시 "이런 중소규모의 병·의원에 대한 사정을 간과하고 시행령 개정안을 통해 스프링클러 설치 등을 강제하는 것은 일률적이고 과도한 법"이라고 비판했다.
병협도 의협과 비슷한 이유로 시행령 개정안에 반대했다. 그러자 소방청은 입법 예고 기간이 끝난 후 국무회의에서 시행령 개정안을 통과시키지 못하고, 다시 의료계 등의 의견을 구하고 있다.
그런데 소방청을 비롯해 보건복지부 등은 의료기관 스프링클러 설비 소급적용까지 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여 의료계의 반발은 더 강해지고 있다.
지난 2월 19일 소방청 주최로 열린 회의에서 보건복지부는 농어촌 및 중소도시 지역 스프링클러 미설치 100병상 이하 병원(전체 1066곳 중 488곳)을 대상으로 설치비를 지원하는 예산을 확보하고 있다며, 2020년 중장기 예산(안)으로 85억 원(2020년 43억 원, 2021년 42억 원)을 지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단, 의료기관 자부담을 40%로 한다는 조건이다.
이 밖에 시행령 개정 이전에 스프링클러를 설치하지 않은 의료기관에 대해서는 3년 이내에 설치(소급 적용)하도록 하는 안을 다시 꺼내 들었다.
의협을 비롯해 병협은 소급 적용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병협은 "병원 리모델링 주기로 소급 유예기간이 최소 5년 이상 필요하다"며 "국비 지원 및 수가 인상 등 스프링클러 설치에 따른 재정지원을 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의협은 "임대건물인 영세한 중소규모 의료기관은 스프링클러 설치 및 복구 비용이 부담되고, 공사 중 진료 차질로 인한 영업 손실 등으로 경영악화가 우려된다"면서 "소급 적용을 한다면, 소급 유예기간 10년 및 국가가 설치비용 및 진료 공백으로 인한 의료기관 손실 보전비용 전액을 지원해야 한다"고 밝혔다.
의협 관계자는 "병원 한 곳 당 스프링클러를 제대로 설치하려면 10억 원이 넘는 비용이 들고, 간이 스프링클러를 설치한다고 해도 1∼2억 원이 든다"면서 "스프링클러 설치에 따른 비용은 물론 설치로 인한 병상 간격 확보를 위한 비용, 진료 공백에 따른 손실 비용을 100% 이상 보전해야 가능한 일"이라고 지적했다.
"정부가 재정지원을 100% 하지 못한다면, 의료기관의 특수성 및 소방시설 설치에 따른 건축물 안전성 문제 등을 고려해 신규로 개설하거나 신축·증축하는 의료시설에만 스프링클러 설치 규정을 적용하는 것이 현실적"이라고 제안했다.
보건복지부는 스프링클러를 미설치한 1066곳의 소방시설 소급 적용에 드는 비용으로 총 1148억 원의 예산안을 작성, 기획재정부에 제출했으나 전액 삭감됐다.
의료계는 정부가 예산도 제대로 마련하지 못한 채 규제만 강화하려고 한다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