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욱 성균관의대 교수(삼성서울병원 가정의학과)
20년 전 본과 3학년이던 나의 첫 임상 실습은 소아과에서 시작됐다. 배정된 환아에 대해 교수님 앞에서 발표하는 것이 첫 과제였다.
나에게 배정된 환아는 관절통을 주소로 내원해서, 급성 백혈병을 진단받은 아이. 아이와 어머니를 면담하고, 첫 실습생에겐 생소한 용어들로 가득찬 차트를 파악했다. 첫 환자였기에 그 이후의 언제보다도 더 열심히, 성실하게 준비했었다.
교수님 앞에서 발표를 시작했다.
"만 4세 김OO 환아, 1999년 3월 O일 입원 했습니다"
여기까지 발표하고, 발표는 중단됐다.
"환자가 죽었나?"
발표자료에 'DOA : 1999. 3. O'라고 쓴 것이 문제가 됐다. 사실 DOA는 그때 주치의 노트에 적혀있던 표현을 그대로 베낀 것이었다. Date of admission(입원일)의 의미로, 교수님께서는 DOA는 입원 당시 사망(Death on arrival)의 약자라고 하시면서, 환자가 병원 올 때부터 이미 사망했느냐고, 꽤 강하게 그리고 오랫동안 질책하셨다. 어려서부터 나름 모범생의 길을 걸어왔으니, 그 전에도 20년이 더 지난 지금까지도 평생 선생님께 그렇게 많이 혼났던 적은 없는 것 같다. 여러 이유로 그 환아의 이름을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다.
요새 새로운 환자 pool이 생겼다. 이제 갓 스무 살 남짓된 환자들. 대개 대학생이거나, 사회초년생이다. 중 노년 환자가 대다수인 나의 외래에 간간이 끼어 들어오는 젊은 친구들이 아직 조금 어색하다.
어렸을 때 암 치료를 받았고, 지금은 성인이 된 환자들이다. 백혈병·림프종·신경모세포종·망막모세포종·횡문근육종·윌름씨 종양 등으로 항암이나 방사선치료, 조혈모세포 이식을 받았던 적이 있다. 주로 방학에 병원을 오니, 요새 같은 방학 시즌에는 많으면 어떤 날은 몇 명씩 오기도 한다.
어렸을 때 항암치료나 방사선치료를 받으면 여러 장기적 합병증의 위험에 노출된다. 성장이 꽤 지체돼 키가 작은 환자들도, 난소기능이 떨어져 무월경에 있는 환자들도 있다. 더 흔하게는 이십 대 초반에 이상지질혈증이 있거나, 공복혈당 장애, 인슐린 저항성을 보이기도 하고, 갑상선 기능이 다소 저하 돼 있는 경우도있다. 외국의 문헌상으로는 받은 치료에 따라 당뇨 위험은 많게는 2∼4배 정도까지, 관상동맥질환은 5∼10배 정도까지 보고되기도 한다.
이들에 대한 나의 역할은 주로 내분비 대사적인 문제들에 대해 모니터링하고 운동과 식습관에 대한 조언을 주는 것이다. 아이들이 성인이 되니 더이상 소아내분비나 소아 신장에 다니는 것이 어색해지고, 질병의 패턴도 성인에 해당하기 때문에 소아청소년과에서 의뢰해 주시는 것이다.
소아암 치료의 발달로 성인이 된 소아암 환자들이 많아지다 보니, 미국 Memorial Sloan Kettering Cancer Center 등에서는 소아암 치료를 마치면, 소아 내분비에서 주로 추적 관찰하다가, 성인이 되면 일반내과나 가정의학과로 보내는 모델이 정착돼 있다.
혼자 오는 환자들도 더러 있지만, 많은 환자들이 아직 어머니와 함께 온다. 면담도 어머니가 주도하는 경우가 많고, 환자 스스로보다 더 많이 걱정 근심을 표현한다. 통상 6개월∼1년 정도 걸리는 치료기간 동안 엄마 입장에서 얼마나 심적으로나 신체적으로 힘들었을지, 이후에도 얼마나 마음을 졸이며 살았을지….
겪어보지 않아 그 심정을 안다고 말은 못하겠지만, 미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아직까지 대부분 처음 보는 환자들이라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이 환자들은 대개 말이 많지 않다. 다소 주눅 들어 보이는 환자들도 꽤 있다. 치료를 받느라, 그리고 몸이 힘들어서 학교를 쉬었거나,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가끔 친구들과 어울려 술 마시는 것을 즐긴다는 환자들을 만나면, 대사질환 위험에 대해 의사로서 잔소리를 하긴 하지만, 내심으로는 사회에 잘 적응한 것 같아 반갑기도 하다.
의사 생활을 한지도 십수 년이 지나다 보니 매일 반복되는 진료가 타성에 빠지곤 하는데, 가끔 오는 이 어린 환자들이 작은 자극과 활력소가 된다.
진료실에서는 의사 역할을 하느라 운동하라 술 줄이라 이런저런 잔소리만 할뿐이지만, 내심으로는 힘든 병을 이겨내고 잘 자라준 것만으로도 정말 대견하고 고맙다.
곧 겨울 방학이 지나가고 나면, 여름방학이 돼야 이 환자들이 다시 올 것이다. 나의 첫 실습 환자였던 김 군도 백혈병을 잘 이겨냈다면 이제 20대 초반일 것이다. 김 군이 어딘가에서 건강히 잘 지내고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