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존 법으로 충분히 처벌 가능…특정 직업군에게만 제재 불공평
스스로 정화·해결하도록 '독립적 면허관리기구 설립 방안' 제시
전날 과음을 한 의사가 진료하면 면허취소와 징역형 처벌을 하도록 규정한 '의료법 일부개정안'이 발의됐다.
더불어민주당 인재근 의원은 지난 5일 '의료행위를 하는 의료인(의사·간호사 및 수습 중인 학생)과 간호조무사 등이 술에 취한 상태나 약물(마약류 및 환각물질)의 영향 등으로 인해 정상적인 의료행위가 어려우면 의료행위를 하지 못하도록 하는 내용을 담은 의료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했다. 이를 위반하면 면허취소와 함께 3년 이하의 징역이나 3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했다.
의료행위가 금지되는 술에 취한 상태의 기준은 혈중알코올농도 0.03%(성인 남성 기준 소주 한 잔) 이상. 혈중알코올농도 0.03%는 전날 과음을 한 경우에도 검출될 수 있는 양이다. 약물(마약, 대마 및 향정신성의약품과 그 밖에 보건복지부령으로 정하는 것)의 경우에는 '정상적으로 의료행위를 하지 못할 우려가 있는 상태'로 규정했다.
대한의사협회는 인재근 의원의 의료법 개정안에 대해 "의료인은 국민의 건강과 생명에 직결되는 일을 하는 전문적 직업인으로써 국가가 법으로 그 자격을 엄격하게 규정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의료인에게 무수히 많은 윤리적 책무(moral obligation)를 요구하고 있지만, 이러한 윤리적 책무까지 모두 법으로 규정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입장이다.
형벌로 반드시 강제해야 할 사항이 존재할 수는 있으나, 이 개정안은 그 제안 이유가 특정 우발적 사건에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사회적 합의 없이 오로지 법제화로만 해결하려는 근시안적인 해결책이라는 것.
이미 현행 의료법 제66조 제1항 제1호에서는 '의료인의 품위를 심하게 손상하는 행위를 한 때'라는 의료인의 윤리와 관련된 조항을 두고 위반 시 자격정지를 부과해 의료인을 제재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의협은 "이번 개정안과 같이 '음주'로 인해 전문적 직업인을 처벌하는 입법례, 즉 변호사 등에 관한 유사 입법례는 전혀 없으며, 공무원에 관한 일반법인 국가공무원법에도 관련 사례가 전무하다"고 강조했다.
다른 직종과의 형평성 문제도 짚었다.
의협은 "인재근 의원이 발의한 의료법 개정안과 함께 음주로 인한 국회의원의 의정활동, 공무원들의 공무 활동 등 모든 공공성을 띠는 직종에 대해서도 음주에 관한 처벌조항을 새롭게 규정할 것인가"라며 반문했다.
의료법 개정안 내용이 매우 불완전하다는 점도 지적했다.
위반 시 행정처분 및 형사처벌 조항까지 두고 있는 '술에 취한 상태'에 대한 구체적 기준과 사회적 합의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는 것.
또 설령 그 기준이 도출된다고 하더라도 그 제재를 위한 측정행위가 반드시 수반돼야 하는데, 이는 상호 신뢰를 절대적 요소로 특수성을 가진 의료인과 환자와의 관계에 근본적인 장해요소가 될 수 있고, 결국 이는 의사의 진료권뿐 아니라 국민의 건강권을 침해하는 행위로 이어질 소지가 매우 크다는 점도 지적했다.
의료법 개정안에서 함께 명시하고 있는 약물(마약류 및 환각물질)은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에 의해 엄격히 관리되는 등 이미 강력한 제재가 이뤄지고 있는 만큼 이에 대해 별도로 의료법에 의료인만을 규율할 필요성이 있는지도 따졌다.
의협은 "'마약류'와 '주류'는 이번 개정안처럼 병렬적으로 규정해 동일 선상에서 제재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무면허 의료행위 등 현행 의료법상 동일한 정도의 형사처벌 대상이 되는 행위들은 본질적으로 높은 정도의 고의성 및 영리성을 필요로하므로, 우발적인 음주 행위와 동일 선상에서 비교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의협은 "음주와 관련돼 현행 제도하에서도 충분히 제재가 가능한 사안을 특정 직업인에게만 제재를 가하고 그 방안에 대해서도 구체적 기준과 사회적 합의에 이르지 못한 개정안에 대해 강력히 반대한다"며 "국민의 건강과 안전을 위한다면 의협과 함께 근본적인 해결책을 마련해 나가야 한다"고 주문했다.
전문가평가제와 독립적 면허관리기구를 통해 스스로 정화하고 해결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도 제안했다.
의협은 "영국을 비롯한 다른 선진국에서 국민의 눈높이에 맞추고 양질의 의료 서비스를 보장하기 위한 자정 노력, 즉 의사면허관리제도를 선행하고 있는 것처럼 현재 의협이 추진 중인 전문가평가제 시범사업과 독립적 면허관리기구 설립을 통해 스스로 정화하고 해결하는 것이 합리적 해결방안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의협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는 무모한 법적 제재보다는 국민과 함께 안전한 진료환경을 만들 수 있도록 정부와 국회가 적극적으로 나서 달라"고 요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