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대석 교수, 제대로 된 입장표명도 못하는 한국 의학계 민낯 분통
의학자들 SNS 통해, 무임승차 비판…반성의 목소리도 나와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의 딸이 고등학생 시절 의학논문 제1 저자로 등재된 것을 두고 의학계 안팎에 논란이 확산되고 있다.
일부 의학자들은 의학논문 출판윤리를 제대로 지키지 못한 것을 두고 "한국 의학계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며 "치욕스럽다"고 평했다.
고등학교 1학년생이 2주간 인턴을 하고 SCI급 의학논문 제1 저자가 됐다는 사실이 알려진 후, 의학계는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는 입장이다.
연구자들은 책임저자의 재량에 따라 고교생이 '제1 저자'가 되는 것을 보고 "무임승차 저자의 출현"이라고 분개했다. '저자됨(authorship)'의 중요성을 다시 되돌아봐야 한다는 반성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먼저 허대석 서울의대 교수(서울대병원 종양내과)는 자신의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 페이스북을 통해 "이번 조국 후보자 딸의 논문 논란은 '한국 의학계의 치욕'"이라고 비판했다.
허 교수는 "의과대학 교수로서 환자 검체를 이용한 실험을 통해 논문을 쓰는 작업을 약 30년간 지도하면서, 대학원 신입생이 논문을 1년 이내에 완성하는 경우를 본 적이 없다"면서 "온종일 실험실에 상주하는 전일제 대학원생도 2년을 일하고 석사 논문을 완성하지 못하는데 고교생이 어떻게 제1 저자가 됐는지 모르겠다"고 개탄했다.
허 교수는 "다른 분야와 달리 실험을 통해 의학논문을 작성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 있고, 그것을 위한 기본적인 시간과 노력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설명했다.
조국 후보자 딸의 논문과 관련해 허 교수는 ▲연구계획 과정 ▲환자의 검체 확보 ▲필요한 실험기법을 배우고 익히는 기간 ▲실험 결과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전문지식을 토대로 논지를 정리하는 과정에 있어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허 교수는 "지도교수와 어떤 주제로 연구할 것인지에 대해 토론하고 관련 분야의 참고문헌을 폭넓게 읽어 이해하는 과정에만 최소한 수개월이 걸린다.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이미 다른 연구자가 수행한 실험을 반복할 위험도 있고, 아무런 의미 없는 연구가 될 수 있어서 연구계획 과정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시약이나 동물 등을 다루는 실험과 달리, 의학 연구는 환자의 검체를 확보해야 한다. 검체를 채취하는 과정 자체도 쉽지 않지만, 환자에게 실험에 참여하도록 동의를 받는 과정은 더 어렵다"고 발힌 허 교수는 "이런 이유로 검체 수집에만 몇 년의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허 교수는 "논란이 된 이번 논문은 genomic DNA 추출, gel electrophoresis, PCR, SPSS 통계 프로그램 등을 이용하고 있다. 숙련된 연구자에게는 쉬운 일이지만, 실험에 익숙하지 않은 초보자인 경우 하나의 실험기법을 익히는 데만 몇 주씩 걸린다"고도 언급했다.
허 교수는 "기본 술기를 익혀도 믿을만한 자료를 얻기까지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야 하는데, 조국 후보자 딸의 논문은 이런 부분이 의심스럽다"고 꼬집었다.
이와 함께 "논문 작성에 가장 중요한 부분은 실험 결과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관련 분야의 전문 지식을 토대로 논지(論旨)를 정리하는 과정"이라며 "일단 정리된 원고를 영어 논문화하는 과정은 부수적인 일로, 전문성을 가진 native speaker의 scientific editing 서비스 지원을 받아 처리하는 것이 관행화된 지 오래"라고 밝혔다.
"논란이 된 논문은 2002년부터 검체를 모으기 시작해, 2008년 12월 11일 논문 제출까지 6년 이상 여러 사람의 노력이 투자된 결과물"이라고 지적한 허 교수는 "이 논문에 고등학생이 인턴으로 일하면서 관여할 자리는 없다"고 했다.
당사자의 천재성 여부와 상관없이, 의학논문은 절차적 요건상 2주 만에 제1 저자가 되는 것은 불가능한 구조라는 것.
허 교수는 "이런 여러 문제가 있고, 사회적 논란이 된 지 2주가 경과했음에도 의학계에서는 제대로 된 입장표명도 하지 못하고 왈가왈부하고 있는 현실 자체가 한국 의학계의 민낯이고 치욕"이라고 부끄러워했다.
서정욱 서울의대 교수(병리학교실)는 최근 [의협신문] 기고글을 통해 이 시점에서 연구자의 반성이 필요하다고 짚었다.
서 교수는 "학술 논문 출판 관련 비위 사실은 연구자의 책임을 면할 수 없고, 영구적으로 남는 문화유산 아카이브인 학술 논문의 완결성을 훼손한다는 점에서 금전 문제보다 훨씬 중요하고 심각하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저자됨(authorship)의 이슈는 책임저자의 고유 권한이었고, 그동안 문제 제기가 적었던 이유는 연구자의 권위를 인정해 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며 "차제에 선물 저자, 유령 저자 등의 오해를 불식시키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한국연구재단도 영어번역은 논문 저자로 인정되지 않는다는 입장을 밝혔다.
지난 1일 자유한국당 최연혜 국회의원이 한국연구재단으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경상북도 소재 한 대학이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소관 연구과제에 참여해 제출한 연구논문이 연구 부정 판정을 받았다.
연구 부정으로 판정한 이유는 연구내용 또는 결과에 대해 과학적 공헌 또는 기여를 하지 않은 사람에게 논문저자 자격을 부여한 것은 부당한 논문 저자 표시에 해당한다는 것.
당시 한국연구재단은 "실험 참관, 영어번역, 영어 수정·교정은 저자포함 조건으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박형욱 단국의대 교수(인문사회의학교실)도 페이스북을 통해 ▲조국 후보자 딸이 진짜로 제1 저자 역할을 수행했는지 ▲조국 후보자 딸이 소속을 한영외고로 밝히지 않고 단국대학교 의과학연구소로 표기했는지 등 의심되는 부분을 확인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박 교수는 "제1 저자는 데이터·정보를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 그 결과를 해석, 원고의 초안을 작성한 자"라며 "이것은 책임연구자가 마음대로 부여하는 것이 아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거의) 모든 의대 교수들은 고등학생이 2주 만에 위 논문의 제1 저자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있다"며 "이 문제만 보더라도 논문은 철회돼야 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