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심 '무과실'→2심 '과실' 다른 판단…대법원 "응급 상황 고려해야"
대법원 "악성신경이완증후군, 신경과 전문의 아니면 알기 어려워"
응급실 당직의사의 진단 및 치료의 한계를 인정, 손해배상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대법원은 '악성신경이완증후군'으로 응급실을 방문, 응급진료를 받다 사망한 A씨의 가족이 의료기관과 의료진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 재상고심에서 심리불속행 기각 결정, 피고측의 과실과 배상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A씨는 2011년 2월 18일 오후 8시 22분 경 두통·오심·구토 증상을 호소하며 B병원 응급실에 1차로 내원했다. 혈액검사 결과, 활력징후·맥박 등은 모두 정상 범위였다.
당시 당직근무 중인 B병원 C의사는 A씨에게 수액과 구토억제제인 멕소롱을 투여, 증세가 호전돼 오후 2시 43분 귀가했다. 그러나 A씨는 다음날 오전 4시 32분 같은 증세를 호소하며 B병원 응급실에 2차로 내원했다. B병원 의료진은 A씨에게 멕소롱을 추가로 투여한 뒤 심호흡을 시키며 산소를 공급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다. 하지만 A씨는 오전 5시 50분부터 의사를 뚜렷하게 표현하지 못한 채 호흡 곤란과 복통을 호소했으며, 안색이 창백해 진 끝에 혼수상태에 빠졌다.
B병원 의료진은 오전 7시 45분 뇌 컴퓨터단층촬영(CT)을 실시한 후 중환자실로 이동, 혈액검사를 시행했다.혈액검사 결과 혈중 칼륨 농도가 7.6mmol/ℓ(참고치 3.5∼5.0), pH 6.91(참고치 7.35∼7.45), 혈중 크레아티닌 농도 2.4mg/dℓ(참고치 0.6∼1.2) 등으로 나타났다.
A씨의 증상을 대사성 산증 및 급성신부전으로 진단한 B병원 의료진은 오전 8시 40분부터 비본(중탄산나트륨 제제)을, 오전 9시부터 칼슘 글루코네이트를 각각 투여했다. 그럼에도 A씨의 증세가 호전되지 않고 혼수상태에서 회복되지 못하자 2월 19일 오전 11경 D병원으로 전원했다.
D병원 의료진도 A씨에게 뇌 CT 촬영을 실시했으나 특이 소견이 없었으며, 12시 40분 경 실시한 요추천자 검사에서 세균감염은 확인되지 않았다.
D병원 의료진은 A씨의 증상을 대사 문제로 인한 의식저하로 판단, 내과중환자실로 입원시켜 같은 날 오후 8시 47분경 투석치료를 시작했다.
2월 20일 실시한 뇌 CT 촬영 결과, 전날보다 뇌부종 증세가 악화된 사실을 확인한 D병원 의료진은 신경과와 상의해 바이러스성 뇌염 가능성을 의심하고 항바이러스제를 처방했다.
하지만 A씨는 당시 뇌 CT 촬영에서 뇌사가 의심되는 상태였으며, 개두술을 실시하더라도 뇌탈출 가능성이 있어 생명유지를 위한 보존적 치료를 계속했다. 결국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A씨는 2011년 3월 8일 사망했다.
A씨의 부모는 B·D병원 의료진의 과실로 사망에 이르렀다며 의료진과 병원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A씨의 부모는 B병원 의료진이 2차 내원했을 당시 멕소롱으로 인한 부작용 또는 급성신부전 및 대사성 산증을 조기에 진단하지 못한 점, 아무런 검사로 실시하지 않은 채 1차 내원 당시 처방했던 진료제와 수액만을 다시 처방한 점, 호흡곤란 및 의식저하를 호소했음에도 간호사가 A씨에게 심호흡을 유도하고 산소를 투여한 것 이외에는 아무런 검사나 치료를 하지 않은 점, A씨가 의식을 상실한 이후에야 뒤늦게 의사를 호출해 혈액검사와 뇌CT 검사를 실시하고 대사성 산증과 급성신부전에 대한 치료를 실시한 점 등을 들어 과실이 있다고 주장했다.
또 D병원 의료진도 A씨가 전원될 당시 급성신부전이 의심되는 상황에서 조속히 혈액투석치료를 실시하지 않았고, B병원에서 멕소롱을 과다투여해 발생한 뇌부종으로 뇌압상승이 예상되는 상황임에도 A씨에게 요추천자 검사를 시행해 소뇌편도탈출을 일으켜 사망에 이르게 한 과실이 있다고 주장했다.
1심 재판부(서울남부지방법원)는 B병원 및 D병원 의료진의 과실로 인해 A씨가 사망했다고 볼 수 없다며 원고의 청구를 모두 기각했다.
하지만 서울고등법원 항소심 재판부는 B병원 의료진이 A씨가 2차 내원했을 때 진료 및 치료과정에서 과실이 있다고 1심 판결을 뒤집었다. 다만 D병원의 과실은 인정하지 않았다.
서울고법 항소심 재판부는 "B병원 의료진(C의사 및 간호사)은 동일한 증상으로 재차 내원한 A씨의 상태가 위중함을 인식하지 못하고 1차 내원 당시 실시한 치료만을 반복했다"면서 "A씨가 호흡곤란을 호소한 이후에도 그 원인을 확인하기 위한 진료나 검사를 실시하지 않음으로써 2차 내원 이후 A씨가 혼수상태에 빠질 때까지 적절한 검사 및 치료를 시행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대사성 산증 상태에서 산증을 극복하기 위해 급하게 호흡을 하는 증상을 보였고, 안색이 창백했던 것도 산소가 제대로 공급되지 않고 저혈압 증상이 나타났기 때문인데, 최소한 이때부터라도 대사성 산증에 대한 치료를 시행하고, 동맥혈검사, CT 촬영 및 척수검사 등 검사를 실시했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B병원 의료진은 A씨의 의식이 상실된 후에야 뒤늦게 A씨에게 급성신부전, 대사성 산증 및 허혈성 뇌손상이 발생한 것으로 진단하고, 저혈압과 백혈구 증가 등이 나타나자 의학적 문제점을 파악하기 시작했다"며 B병원 의료진의 과실을 인정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B병원 의료진이 진단 및 치료 의무를 소홀히 한 과실과 A씨의 사망 사이에 상당인과관계는 인정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A씨가 B병원 2차 내원 후 약 1시간만에 상태가 급속히 악화했음에도 의사에게 이런 환자의 상태를 보고하지 않고, A씨가 의식을 상실할 때까지 아무런 조처도 하지 않아 치료 기회를 갖지 못하도록 한 것은 불성실한 진료를 행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며 "A씨 및 부모에게 정신적 고통에 대해 배상할 의무가 있다"고 판결했다.
반면, D병원 의료진에 대해서는 "혈액투석이 지연될 경우 대사성 산증이나 다장기 기능부전을 일으킬 수 있으나, 당시 A씨는 긴급하게 투석이 필요한 정도의 신부전에는 해당하지 않았다"며 과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2심 판결에 대해 원고 측과 피고 측 모두 대법원에 상고했다.
대법원은 항소심 판결을 파기 환송, 다시 심리해 판단하라고 주문했다.
대법원은 "A씨에게 나타난 대사성 산증은 전문 의료진에 의한 진단과 치료가 가능한 반면, 응급실 상황에서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검사해야 하는데다, 일반 의료진 능력으로는 진단과 치료에 한계가 있으므로 즉시 동맥혈가스분석 검사를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당직의사에게 과실이 있다고 연결하기는 어렵고, 치료가 약 3시간 정도 늦어진 것을 치명적 범실로 보기는 어렵다"고 짚었다.
대법원은 "대사성 산증, 뇌부종으로 인한 뇌사 등 악성신경이완증후군에 따른 일련의 증세가 진행하면서 A씨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악성신경이완증후군 환자를 다뤄본 경험이 있는 일부 신경과 전문의가 아니면 알기 어려운 질병"이라며 진료기록 촉탁감정 결과를 인용했다.
"A씨가 내원한 이후 혼수상태에 이를 때까지 적절한 치료와 검사를 3시간 지체했다고 하더라도, 일반인의 수인한도를 넘어설 만큼 현저하게 불성실한 진료를 행한 것으로 평가될 정도에 이르지 않는한 피고 측의 위자료 배상책임을 인정할 수 없다"고 판단한 대법원은 B병원 측의 패소 부분을 파기, 사건을 다시 심리·판단하라고 환송했다.
파기 환송심은 대법원의 판결을 받아들여 원고 측의 항소와 원심 법원에서 확장한 청구를 모두 기각했다.
원고 측은 대법원에 재상고했으나, 10월 31일 심리불속행 기각 결정으로 재판이 마무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