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 없는 세상 향한 봉사 여정 50년

차별 없는 세상 향한 봉사 여정 50년

  • 정지선 보령제약 사보기자 admin@doctorsnews.co.kr
  • 승인 2020.02.21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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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향애 한국여자의사회장
"가까이서 봉사할 수 있는 의사라는 직업 선택해 다행"

한국여자의사회 이향애 회장은 여성 의료 전문가로서 평생 대한민국의 모든 이웃들이 인간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의료봉사의 저변을 확대하고 연속성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1968년 의과대학 재학 시절 제주도 농어촌 의료봉사로 시작된 그의 봉사 여정이 자그마치 50여 년이다. 그동안 고대의대봉사회·대한의사협회 의료사랑나눔·선한봉사센터·불자의료봉사단체 무량감로회 등과 함께 외국인 노동자·새터민 이주노동자·다문화가족·쪽방촌 거주 독거노인 등을 두루 돌보며 의료봉사의 의미를 실천해온 이향애 회장. 그저 사람이 좋아서, 참 의사로 바르게 살고 싶었을 뿐이라는 그에게 누구 하나 소외됨이 없는, 차별 없는 세상을 위한 노력에 대해 들었다.

이향애 한국여자의사회장  사진 / 서민규 포토그래퍼
이향애 한국여자의사회장  사진 / 서민규 포토그래퍼

50여 년 전 방학 기간 동안 무의촌 오지를 찾아 봉사를 다니는 것이 연례행사였던 의대 재학 시절, 당시 학생회 여학생 부회장이었던 이향애 회장 역시 그렇게 제주도 산간지방으로 첫 의료봉사를 가게 됐다.
"초등학교 교실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동네 주민들을 진료하던 선배님들을 보조하면서 마치 햇병아리 의사가 된 것 마냥 뿌듯했던 기억이 있어요. 저와 같은 연배의 의사들이 다들 그렇겠지만, 의사로서 누군가를 돕는 일은 그때부터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정형외과 전공의 수련을 할 때는 국가 지침에 따라 무의촌에서 6개월 간 근무해야 했다. 이향애 회장은 그때 비로소 열악한 의료환경을 경험하며 전혀 다른 세상을 알게 됐다고 회고한다.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돕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을 마음 속 깊이 품었던 그는 동부시립병원에서 전문의로 일하면서 많은 의료급여 환자, 무연고 환자들을 만났고 그 생각을 더욱 구체화하게 된다.

"돈 못 내는 고령의 환자들에게 도망치기 좋도록 담이 낮은 곳을 알려줬지만, 번번이 다시 돌아오곤 했어요. 형편이 어려운 환자를 위해 일부러 스터디 케이스를 만들었던 기억도 납니다."

개원 후 2001년경 고대교우회에 사회봉사단이 만들어지게 되는데, 이향애 회장은 선뜻 의료봉사를 맡아 성북구 관내 경로당 순회 진료를 시작했고 복지회관의 장애인 치매 환자들을 대상으로 진료와 함께 운동요법을 가르쳤다. 개성공단인민병원과 금강산인민병원을 찾아 방문진료했으며 2004년에는 서울역과 숭인동 쪽방촌으로 봉사 규모를 키워 나갔다.

2008년부터는 고대의료봉사회를 조직해 매달 셋째 토요일 서울시SH공사와 MOU를 맺고 독거 노인·장애인·탈북자들을 진료하고 있다. 매달 둘째 일요일에는 조계사에서 무량감로회와 함께 취약계층을 돌본다. 2011년부터 고대평생교육원에서 지역주민들에게 '바른 자세 몸 살림운동'을 전개해 스스로 건강을 관리할 수 있도록 돕고 있으며, 2012년부터 의료봉사단을 꾸려 필리핀 나보타스시 해상판자촌 해외봉사를 진행하고 있다. 이향애 회장이 다양한 방법과 경로로 인술을 실천해온 이유는 좋은 의사이고 싶어서다.

한국여자의사 120년, 선교사의 도움을 기억하다

전체 의사 중 여성 의사의 비율은 26% 정도로 의사 4명 중 1명은 여성인 시대가 됐다. 여성 의사의 비율과 사회적 역할이 증가하고 있으며 여성 의사를 위한 제도의 필요성도 커지고 있다. 2018년 한국여자의사회 회장에 취임, 미혼모지원사업을 창안하고 조손가족 어린이를 후원하는 등 여성 의료 전문가의 역할과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있는 이 회장에게 여자의사회의 활동에 대해 물었다.

"대한의사협회·서울시의사회 등 다른 유관단체와의 긴밀한 협조 아래 여의사들의 의사회 참여를 장려하고 역할 증대를 꾀하고 있습니다. 한국여자의사회 조직 내부에 인권위원회와 인권센터를 설립했으며 특히 여성가족부 등과 협력해 양성 평등 실현과 의료기관 내 폭력사태가 발생하지 않도록 제도적인 틀을 구축하는 데 역점을 두었습니다."

'참된 의사로서, 현명한 여성으로서, 건강사회의 지도자로서'가 모토다. 글로벌화 추세에 맞춰 세계여자의사회 학술대회도 개최하는 등 국제무대에서 역량을 과시했으며 올 10월엔 세계여자의사회 서태평양지역 국제학술대회를 서울에서 개최할 예정이다. 최근 젊은 여자의사회원들의 경쟁력을 높여주고자 보령전임의학술상·한미젊은여의사학술상 등을 제정하고 학술활동도 독려하고 있다.
여성과 남성의 편가르기, 차별과 혐오가 짙어지고 있는 대한민국의 현실을 이 여성리더는 어떻게 바라볼까?
"1970년대에 정형외과를 전공하다 보니 여자는 나 혼자였어요. 학회를 가면 여자화장실도 없었을 정도였고, 욕심이 많아서 정말 열심히 했는데 첫 어시스턴트 발탁에 남자 동기가 뽑히는 모습에 실망하기도 했죠. 하지만 그 시절을 나는 남자 동료들의 많은 도움이 있었던 정이 넘쳤던 시절로 기억합니다."
남성과 여성이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여성의 강점인 대화와 소통을 통해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가면 그만이다. 상대방에 대해 '다름'이 아닌, '모름'을 인정하고, 알기 위해 공부하고 이해해야 한다는 말에서 다른 이의 좋은 점을 알아내고 확장시키고자 하는 리더의 섬세함을 느낄 수 있다.

"올해는 우리 나라 첫 여의사가 배출된 지 120주년이 된 뜻깊은 해입니다. '박에스더(본명 김점동)'가 미국 볼티모어여자의대에 유학해 여의사가 된 해가 1900년이었죠. 한국여자의사 120년의 기록을 담은 '한국여자의사 120년사'를 제작 중인데, 개화기 당시 대한민국의 발전을 위해 고생한 의료선교사들의 고마움을 새삼 실감했습니다."

한국여자의사 120년사는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역경을 이겨내고 여의사의 꿈을 이룬, 그 시대에 사회적 약자였던 여성을 깨우치고 교육했던 선각자들의 정신을 잊지 않기 위해 기획됐다. 이 회장은 한국에서 치료는 물론 교육에 힘썼던 의료선교사 로제타 셔우드 홀 여사의 후원이 있었기에 대한민국 여의사 1호의 탄생이 가능했다고 강조했다.

"과거 우리가 어려웠던 시절, 이웃들로부터 받았던 도움을 기억하고 되갚고 나눠야 합니다. 여자의사회장에 취임해 필리핀 나보타스시 해상판자촌 의료봉사를 재개한 것도 그 곳 주민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지속가능한 도움을 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한국여자의사회는 일거리가 없는 수많은 해상판자촌 젊은이들을 위해 김치공장을 만들고자 한 나보타스교회 박선호 선교사의 아름다운 행적에 동참하고 있다. 

의사는 환자가 있기에 존재한다

이향애 회장은 봉사라는 용어나 형식에 집착하지 않는다. 다만 의사로서 소박하게라도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고 싶다는 생각만은 늘 변함이 없었다. 의료인으로서 참다운 삶을 살고자 했으며, 그것이 곧 환자에 대한 사랑이라는 견고한 믿음이다. 진료실에서 만나는 한사람 한사람의 삶을 귀하게 여기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고통과 고민을 함께 하기 위해 바쁜 시간을 쪼갰다. 정성을 다해 소통하다 보면 곧 행복한 일이 생기더라는 것이 50여 년 봉사의 결론이다.

"사실 화가가 되고 싶었는데, 결국 사람을 치료하는 의사가 됐습니다. 무궁무진한 상상력을 표현해내는 화가처럼, 의사도 창조적인 직업이라 생각합니다. 정형외과 전문의로서 근골격계통을 재건시켜줄 수 있으니 말입니다(웃음). 지금은 봉사를 가까이 할 수 있는 의사라는 직업을 선택한 것을 다행으로 여깁니다."

언제나 환자에게 좋은 의사가 돼야 한다는 단순한 신념과 넉넉한 인간미는 이향애 회장을 더욱 돋보이게 만든다. 그는 17년 동안 종합병원 정형외과 전문의로서 현장에서, 수술실과 응급실을 오가며 의사의 소임을 다했다고 여겼던 때도 있었지만, "길목 한 귀퉁이에 자리 잡으면서 동네의사로서 환자에게 다가가는 내 모습이 새롭게 느껴졌고, 나를 찾아주는 이들이 모두 반갑고 고마웠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이제 "그 곳에 가면 내 말을 믿고 잘 들어주는 의사가 있다"는 말을 듣고 싶다. 그런 의사로 기억될 수 있도록 환자들의 말을 더 경청하고 애환을 나눌 것이다.

"이제 의료봉사도 최극빈층이나 독거노인·장애인 등 돌봄이 필요한 계층을 제대로 발굴해 지속적으로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야 합니다. 또 예방차원에서의 체계적인 건강관리에 대한 교육도 반드시 병행돼야 합니다."

인술로 사랑을 실천한 이들에게 수여되는 보령의료봉사상의 무게를 잘 알고 있기에, 이 상을 받을 자격이 되는지 되돌아보게 된다는 이향애 회장. 더욱 정진하라는 격려로 받고 남은 여생을 어떻게 보낼지 생각을 가다듬는다. 병원 문턱이 높아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이웃이 없는지 주변을 세심히 살피고 그들을 보듬어 나가겠다는 책무를 무겁게 새긴다. 정성을 다해 나눔을 실천하는 일은 언제나 존중받아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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