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弔辭] 덕암(德巖) 문태준 의협 명예회장님의 영면을 기원하며

[弔辭] 덕암(德巖) 문태준 의협 명예회장님의 영면을 기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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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0.03.12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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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촌회(二村會) 일동 호곡(號哭)

고 문태준 대한의사협회 명예회장 ⓒ의협신문
고 문태준 대한의사협회 명예회장 ⓒ의협신문

덕암(德巖) 문태준(文太俊) 대한의사협회 명예회장님께서 소천하셨다는 소식에 허탈하고, 분주한 마음을 가다듬어 오래 묵혀둔 펜을 다시 들었습니다.

망백(望百)을 지나 상수(上壽)를 바라보며 오래도록 가까이서 뵈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했지만, 기어이 이별의 순간을 맞고야 말았습니다. 

의료계가 내부적으로 어려울 때마다 "겸손한 자세로 몸을 더 낮추고, 대화와 소통을 통해 회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며 준엄한 목소리로 후배들을 끌어주시던 모습 생생합니다.

명예회장께서는 1950년 서울의대 의예과 졸업 한 달여 만에 터진 6·25 한국전쟁의 와중에 북한군에 끌려가 구사일생으로 탈출, 최전선 외과 군의관으로 생사의 고비를 넘겼습니다.

전쟁이 끝난 직후인 1954년에는 미국 유학길에 올라 토머스 제퍼슨대학병원 신경외과 및 신경과에서 4년간 수련과정을 밟고 미국 신경외과 전문의 자격을 취득했습니다. 미국 병원에 남아달라는 간곡한 요청도 "전쟁으로 폐허가 된 조국을 위해 일하겠다"는 굳은 소신을 흔들 수는 없었습니다. 

1957년 귀국한 뒤에는 학연을 뛰어넘어 모교인 서울대병원이 아닌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외과에서 교편을 잡았습니다. 병원 화장실 공간에 어렵게 신경외과를 개설하고, 1961년 국내에 처음으로 신경외과학교실의 독립과 대한신경외과학회 창립을 비롯해 제8대 회장(1968∼1969년)을 맡아 대한민국 신경외과학이 굳건히 뿌리 내릴 수 있도록 견인차 역할을 맡았습니다.

1969년 7월 미국 하원의장의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한 의원대표단이 백악관에서 닉슨 대통령과 만났다. 이 자리에는 포드 부통령과 김영삼 의원이 함께 했다(사진=문태준 명예회장 회고록 '모든 사람에게 건강을', 사단법인 샘터사)
1969년 7월 미국 하원의장의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한 의원대표단이 백악관에서 닉슨 대통령과 만났다. 이 자리에는 포드 부통령과 김영삼 의원이 함께 했다(사진=문태준 명예회장 회고록 '모든 사람에게 건강을', 사단법인 샘터사)

명예회장께서는 1967년 돌연 세브란스병원 신경외과학교실 주임교수를 사직한 채 고향인 경북 영덕에서 지역구 국회의원 출마를 선언했습니다. 질병을 고치는 소의(小醫)를 넘어 사회를 바꿔보겠노라며 대의(大醫)의 길을 걸었습니다. 39살 나이에 1967년 경북 영덕에서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 당선, 1980년 제10대 국회의원까지 14년 동안 4선 의원으로서 상공위원장·국토통일위원장·운영위원장 등을 맡아 전쟁으로 무너진 경제 발전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1980년 비상계엄과 군사 쿠데타로 인한 정치적 혼란과 규제의 시련 속에 정계를 떠나 대한의사협회장에 당선, 의협과 의료계 발전을 위해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습니다.

의협 회장을 세 번 연임한 9년 동안 의사와 의료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개선하고, 의협의 역량을 결집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특히 야간에 수술할 수 있는 병원을 찾아 헤매다 사망하는 비극을 막기 위해 야간 구급환자 신고센터를 개설, 서울시와 정부 차원에서 119구급대를 출범토록 하는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당시 만연했던 간염을 예방하기 위해 전국적인 캠페인을 벌였으며, 메디컬 드라마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KBS 1TV 드라마 '소망'을 방영토록 지원함으로써 '국민과 함께하는 의사'의 이미지를 확산했습니다.

대한의사협회는 1979년 9월 1일 서울시 용산구 동부이촌동 회관에 야간구급환자신고센터를 개소했다. 문태준 대한의학협회장(오른쪽)이 야간구급환자신고센터 현판을 개소하고 있다. 의협 야간구급환자신고센터는 119구급대의 모체가 됐다. ⓒ의협신문 DB
대한의사협회는 1979년 9월 1일 서울시 용산구 동부이촌동 회관에 야간구급환자신고센터를 개소했다. 문태준 대한의학협회장(오른쪽)이 야간구급환자신고센터 현판을 개소하고 있다. 의협 야간구급환자신고센터는 119구급대의 모체가 됐다. ⓒ의협신문 DB

평생교육제도를 확립하고, 윤리위원회 활성화를 통해 의학과 의료의 전문직업성을 높여나갔습니다. 의협 의료배상공제조합의 전신인 공제회를 발족해 의료분쟁 발생 시 조합원들이 서로를 보호하고, 안전하게 진료할 수 있는 환경도 만들었습니다. 

일찌감치 의학의 세계화와 의사단체의 국제 연대를 강화하는 데 앞장, 1981년 제12차 아시아오세아니아의사회연맹(CMAAO) 총회에서 회장에 선출, 국제무대에 진출하는 물꼬를 텄습니다. 1985년에는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세계의사회(WMA) 총회에서 회장에 취임, 아시아를 넘어 세계무대로 발판을 넓혔습니다. 이를 기반으로 의협은 WMA 부의장국·이사국 등을 맡아 한국 의학 및 의료계의 위상을 높일 수 있었습니다.

의협 회장에 이어 제23대 보건사회부 장관(1988∼1989년)으로 8개월 동안 재임할 당시 전 국민 의료보험제도 도입을 선언하기도 했습니다.

메디컬 드라마의 효시로 일컬어지는 KBS 1TV 일요아침드라마 소망. 3년간(1980년 9월 21일~1983년 11월 16일) 156회를 방영한 '소망'은 의사와 의료계에 대한 인식을 새로하는 데 기여했다. 당시 문태준 의협 집행부는 의료분쟁과 환자와의 갈등이 갈수록 늘어나자 의료계의 실상을 전달하기 위해 의학자문과 <span class='searchWord'>소품</span>까지 제공하며 소망을 후원했다. ⓒ의협신문 DB
메디컬 드라마의 효시로 일컬어지는 KBS 1TV 일요아침드라마 소망. 3년간(1980년 9월 21일~1983년 11월 16일) 156회를 방영한 '소망'은 의사와 의료계에 대한 인식을 새로하는 데 기여했다. 당시 문태준 의협 집행부는 의료분쟁과 환자와의 갈등이 갈수록 늘어나자 의료계의 실상을 전달하기 위해 의학자문과 소품까지 제공하며 소망을 후원했다. ⓒ의협신문 DB

명예회장께서 평생 꿈꿔온 '모든 사람에게 건강을'이라는 화두는 지속해서 해결해 나가야 할 숙제입니다. 명예회장께서 늘 걱정한 급속한 노령화, 연구·기술 개발에 대한 투자 부족, 이원적 의료제도, 노사 분규, 남북통일 등 문제 해결은 여전히 난망합니다. 

화장실에까지 전화기를 가설해 맡은 책임을 다하고자 했던 명예회장님의 열정이 후학들에게 이어져 꽃을 피우고, 결실을 보길 기원합니다. 의학 발전과 의료계의 자립을 위해, 국민과 나라를 위해 짊어진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평화의 안식과 함께하시길 앙망합니다.

2020년 경자년(庚子年) 3월 11일

이촌회(二村會) 일동 호곡(號哭)

이촌회(二村會)는 고 문태준 의협 회장 재임(1979∼1988년) 당시 함께 집행부를 이끌던 이사 및 감사들이 의료계 발전을 지속해서 지원하기 위해 만든 단체다. 2009년부터 박희백 의협 고문(대한체육회 이사 및 한국올림픽위원회 위원장)이 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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