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9 국치일, 누가 기억해야 하나

8·29 국치일, 누가 기억해야 하나

  • 장성구 한국의학교육평가원 이사장 admin@doctorsnews.co.kr
  • 승인 2020.03.24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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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손들에게 물려줘야 할 '가치있는 미래' 고민할 때"

장성구 한국의학교육평가원 이사장
장성구 한국의학교육평가원 이사장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외세의 침략으로 인해 우리만큼 슬픈 역사를 갖고 있는 민족도 드물다. 질곡의 세월과 통한의 쓰라림을 겪기도 했고, 삼전도의 굴욕 같은 극한의 모욕을 당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슬기로움과 지혜를 통해 수난을 극복하고 자랑스러운 역사와 빛나는 문화를 이뤄왔다. 그러나 오직 한 번, 자주적인 삶을 송두리째 내던져 버린 일이 있다. '국치일'이라고 말하는 1910년 8월 29일은 오천년 민족사를 통하여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격은 통절(慟絶)의 한이 서린 날이다.

우리 민족의 모든 삶을 일본의 천황에게 통째로 내어준 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류의 역사 속에서 일시적이나마 백의민족이 사라진 슬픈 역사가 시작된 날이다. 그로부터 불과 백 수년이 지난 오늘에 있어 그날의 치욕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고 있다.

먹고 살기에 바빠서인지,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사이기 때문인지 몰라도 우리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 날이 되어 버렸다. 인터넷 검색을 하면 국치일(national humiliation day)이라는 말과 함께 1910년 8월 29일이라는 기록을 겨우 찾을 수 있다. 

역사의식이 있는 민족은 미래가 있다고 했다. 우리는 역사의식이 없어도 아름다운 미래를 기약할 수 있는 특별한 민족인지? 아니면 역사의식이 없기 때문에 미래를 점쳐 볼 가치조차 없는 민족으로 전락한 것인지 잘 모르겠다.

자랑스럽고 찬란한 역사만이 우리의 것이 아니고, 미래 지향적인 삶의 원동력인 모든 과거는 꼭 기억해야 할 우리의 역사다. 이것이 사회적 통념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역사관이라고 조심스럽게 말해보고 싶다.

우리나라 의료계의 역사 속에는 의사(醫師)이면서 지식인으로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의로운 역할을 한 선구자 분들이 많다. 몽골의 신의(神醫) 이태준, 이상촌을 건설한 김필순, 항일 무장 투쟁가 나창헌, 여성운동가 최정숙, 항일운동가 박서양·서재필 선생 등이 그분들이다.

이분들은 의사(醫師)이면서 항일운동에 앞장섰던 존경스럽고 자랑스러운 애국지사들이다. 오늘날 의사인 우리는 이분들의 올곧은 송죽(松竹)의 정신을 자랑스럽게 이어받고 있다. 

전 세계 여러 나라의 역사에서도 각자의 조국을 위해 의로운 행동을 한 의사(醫師)들이 많다. 지식인의 사회적 책무(noblesse obligue)를 누구보다도 먼저 실천에 옮긴 분들이라고 생각한다.

중국 신해혁명의 주역인 손문과 노신(의학을 공부한 문학인)이 그렇고,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인 사르트르가 '20세기 가장 완벽한 인간'이라고 격찬한 남미의 체 게바라(Che Guevara)도 의사다. 그는 진보적 젊은이들의 멘토이면서 이념과 국가를 뛰어넘는 전설적 혁명가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일본 명치유신의 정신적 지도자였던 난학파(蘭學派)의 스키타 겐바꾸 등 많은 위대한 사람들 역시 의사(醫師)다. 이외에도 전 세계 여러 나라에서 무수히 많은 의사가 나라와 국민을 위해 의로운 일을 많이 했다.

우리나라의 186개 의학 학술단체를 대표하고 총괄하는 (사)대한의학회는 (사)화서학회와 힘을 합쳐 '국치일 기억하기 운동'을 펼쳤다. 대한의학회로서는 의사의 사회적 책무를 실천에 옮기는 아주 작은 일 중의 하나였기 때문에 결정한 사안이다.

(사)화서학회는 조선말 나라가 기울어 갈 때 항일 의병의 주축을 이뤘던 화서학파 학맥의 철학으로 볼 때 항일 의병 정신의 재탄생이라는 생각으로 이 운동에 기꺼이 동참했다고 생각한다. 수개월의 노력 끝에 전국 규모의 59개 학술단체와 민간사회단체의 적극적인 지지를 얻어 냈다.

동참을 호소했던 발의문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모든 민족과 국가는 자랑스러운 역사도 있지만 기억하기 싫은 사건이나 순간이 있게 마련이다. 이 모두를 기억해야 하는 것이 후손으로서 기본적인 책무라 하겠다. 특히 역사적으로 부끄러운 일과 사건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민족은 미래를 약속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국가 사회는 단절의 역사와 혼란(chaos)의 미래만 있게 마련이다. (중략) 그렇기 때문에 아주 작은 일이지만 매우 중요하다고 판단해 '국치일 기억하기 운동'을 전개하고 동참할 것을 호소하며 우리 후대를 위한 시대적인 사명을 다하는 어른다운 어른들이 되자고 호소하는 바입니다." 

정부에 대한 건의 사항은 국치일인 8월 29일을 국내에서 제작하는 모든 달력에 표시하자, 국치일인 매년 8월 29일에 대국민 담화를 발표해 경각심을 일깨우자, 8월 29일 국치일에 대한 역사적 기록을 교과서에 보다 정교하게 기술하라, 국치일에 전국적으로 조기를 계양하자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열정을 다해 추진한 이 운동은 크나큰 좌절을 맛보게 되었다. 이 운동에 지지를 보냈던 전국의 10만여 명의 의지가 한순간에 꺾이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했다. 정부 중앙부처 어디에서도 이 운동의 뜻을 담은 건의서를 접수해 주지 않았다. 자기네 부서의 소관 사항이 아니다.

건의 사항의 내용이 다양하니까 각각의 부서에 분산 건의하라 등 접수를 거절하는 이유도 다양했다. 서류 뭉치를 들고 여기저기에서 천대받고, 문전박대를 당하고 있는 우리들의 삶의 좌표는 무엇일까? 이 시대의 선각자인지? 고리타분한 주장으로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 시대의 낙오자들인지? 

"이제 와서 무슨 국치일을 기억하기는…"이라며 이맛살을 찌푸렸을 공무원들의 시선이 관청에서 쫓겨나오는 뒤통수를 강하게 스치는 듯했다. 우리를 슬프게 하는 사람들이 목에 힘을 주고 있는 이 사회의 미래를 상상해보면 과연 어떤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우리는 평범한 사람들의 상식이 통하고, 시시비비가 없는 편안한 사회를 경험해 보지 못한 아픔을 갖고 있다. 한 시대의 사생아란 이런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니 무거운 마음에 눈이 감긴다. 

역사를 두려워하고 문화를 존숭하는 사회. 다양한 지식인들의 의견이 수용되어 상식이 통하고 시민들이 불편을 모르는 사회. 모든 사람들의 생각이 서로를 향해 화합의 꽃을 피워, 미워하지 않는 사회. 자유 민주주의 진정한 아름다움 속에, 평범함이 소중한 가치를 갖는 사회. 왜곡되고 편협한 생각을 갖은 자들이 권력의 중심에서 국민을 억압하지 않는 사회. 이것이 진정 우리가 원하는 것이고,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대한민국의 미래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미래를 걱정하고 희망의 역사를 설계하는 사람들은 뼈에 사무치는 국치일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지식인의 최소한의 책무이며, 의사로서의 소임은 더욱더 그러하다.

대한민국의 역사가 살아 있고, 국민이 존재하는 한 '국치일 기억하기 운동'은 지속해야 한다. 국치일을 기억해야 할 사람들이 통한의 이 날을 가슴속에 새기지 못하는 것은 자신에게는 부끄러운 일이고, 후손들에게 어른답지 못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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