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물이 만들어내는 공간이 시간의 흐름 속에 어떻게 변화하고
사용자가 어떻게 이용하고 만족하는가에 대한 고민과 과정의 결과
병원건축을 포함한 건축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와 특수성에 대해 알아본다. 설계 과정은 어떻게 되는지 각자의 역할은 무엇인지에 대해 건축가의 시선으로 바라보고자 한다.
건축의 행위는 인류의 역사와 같이 시작되었음에도 우리나라에서는 건축을 정의하는데 있어서 저마다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서로의 갈등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그래서 먼저 건축이 무엇인지에 대해 얘기해보고자 한다.
건축을 향한 다른 시선들
"소장님! 큰일 났습니다. 지하층의 양변기에서는 물이 나오는데 세면대에서는 물이 나오질 않아요. 어쩌죠?"
십수 년 전 준공한 청사 담당자의 급한 전화를 받았다. 이런 저런 방안을 주고받으며 해결책을 찾다보니 불현듯 무한하고 영원한 서비스를 바라는 클라이언트의 바램 앞에 건축가의 업무가 어디까지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먼저 건축가란 단어에서 그 답을 찾아본다. 건축이 의식주의 하나를 차지하는 만큼 건축가는 꼭 필요한 직업이며 상당히 오래된 전통을 갖는다. 건축가를 뜻하는 'architect'의 어원은 그리스어 'arkhitekton'인데 '만드는 행위를 하는 사람의 우두머리' 쯤으로 해석된다. 그래서 그런지 서양에서는 신을 건축가로 묘사하기도 했고 화폐에 건축가를 넣는다든지 사회적 위상이 높다.
건축(architecture)이라는 말도 으뜸의 기술로 해석된다. 현재의 사전적 의미로는 예술과 과학의 중간에 있는 고유한 영역에 있다. 공학과는 명확히 구분이 된다. 이렇게 서양에서 정의되고 발전된 건축의 개념은 우리나라에서는 다소 생소하다.
우리나라에선 원래 건축이란 말은 없었다. 건물을 짓는 일을 영건(營建)이나 영조(營造)라 했고 집은 지을 때는 대목, 도목수 등의 장인이 지휘를 했다. 육체노동을 주로 하는 기술자와 건축가를 별도로 구분하지도 않았다.
그러다가 근대에 들어 일본에서 서양의 'architecture'를 건축(建築)이라는 용어로 사용하고 우리도 일제 강점기에 이를 받아들이게 됐다. 해방과 전쟁을 겪은 후에도 별다른 비판 없이 이러한 건축에 대한 관점을 가져왔다. 출발점이 다르다 보니 서양의 인문학적 발전과 궤를 달리하는 건축의 개념을 갖게 되었다.
건축, "예술과 과학의 중간 고유한 영역"
서양에서는 건축과 건설을 그리고 'architect'와 'builder'를 완전히 분리해 사고하는데 반해 우리나라는 그렇지 못하다. 이러한 것을 알 수 있는 것이 학문 분류 체계인데 우리나라에서는 건축을 공학 아래에 두고 있는데 반해 국제적 학문 분류에는 예술인문학(Arts & Humanities)에 속해 있다. 족보가 아예 다른 것이다. 지금에야 대학 내에 건축학과라는 명칭이 생겨났지만 그전까지는 건축공학과라는 틀 아래 있었다.
일제의 잔재로 볼 수 있는 우리나라의 건축은 디자인 중심이 아니고 기술에 중심이 있었다. 이러한 혼동은 현재진행형이며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법적, 제도적, 기술적 의미가 강한 '건축사'와 예술적, 문화적 의미가 강한 '건축가'가 혼용돼 사용된다. 이를 대표하는 건축사협회와 건축가협회가 별도로 있는 나라는 일본과 함께 우리나라가 유이할 것이다.
다시 돌아와 청사 담당자의 입장이라면 건축과 건축가를 바라보는 관점이 혼용돼 사용되고 있는 우리나라의 특수성을 감안하면 세면대에 물이 나오지 않을 때 건축가를 찾을 수도 있다. 비단 한사람만의 관점이 아니고 일반 대중이 그러하다.
어떤 클라이언트는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관점에서 건축가의 창의적 사고에서 나오는 결과물을 요구하기도 하고 어떤 클라이언트는 본인이 더 훌륭한 안목과 취향을 가졌다고 생각하고 기술적인 부분만을 강하게 요구하기도 한다. 이 경우 건축가의 전문성과 지위가 제대로 인정되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건축이 보편적인 시각으로 정의되지 않고 여러 시각이 존재하는 현시점에서 우리나라에서 건축을 하려면 유연함을 가지면서 경계의 모호성을 잘 버무릴 줄 알아야 한다. 다소 넓은 폭의 요구와 이에 대응하는 접근 방식도 필요하다. 건축이 융합을 잘해야 하는 영역이고 건축가는 코디네이터의 성격이 강하다는 관점에 동의한다.
좋은 집을 지으려면 좋은 설계를 하고 이를 바탕으로 시공을 해야 한다. 건축가의 능력을 최대한 끌어내는 것이 기본이다. 그렇게 하고 싶다면 건축가와 소통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병이 있을 때 전문적인 판단과 최종 결정은 전문가인 의사에게 맡기듯이 클라이언트로서 충분하게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고 결과를 바라볼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
사람을 위한 공간
로마건축가 비트루비우스는 건축은 내구성(firmitas), 유용성(utilitas), 아름다움(venustas)을 만족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필자는 간삼건축의 사명을 이용해 건축을 설명하는 것을 즐겨한다. 간삼(間三)은 인간, 시간, 공간을 의미한다. 건축은 건축물이 만들어내는 공간이 시간의 흐름 속에 어떻게 변화하고 사용자가 어떻게 이용하고 만족하는가에 대한 많은 고민과 그 치열한 과정 속의 결과여야 한다.
병원설계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병원이 상당한 복잡한 기능의 집합체이며 그 규모가 대단해서 한정된 공간 안에 작은 마을의 인구와 맞먹는 이용자가 있는 밀도가 높은 건축이라는 점에서 건축가는 병원을 단일한 건물로 바라보는 사고에 더해 커뮤니티나 도시를 바라보는 관점도 가미하게 된다.
그리고 정책의 변화나 의료소비자들의 요구에 즉각적으로 대응돼야 한다. 일반적인 건축물보다는 좀 더 기능이 강조되고 효율성, 가변성 등을 고려해야 한다. 그러나 이렇게 논리적인 면만 강조하다 보면 건축의 본질인 사람을 위한 공간임을 간과하게 만들어 버리곤 한다. 그래서 이러한 점을 경계하면서 새로움을 만들어야 한다.
우리나라는 근대화와 인구 팽창에 따라 건립된 초기의 서양식 병원들은 폭발적인 수요 증가에 대응하고자 규모를 확장하기 위한 증개축 과정을 거치며 현재의 병원의 모습으로 발전해 왔다. 그 과정에서 실패한 증개축은 건축물의 질을 떨어뜨리고 환자들의 만족도를 낮춤으로써 병원 경쟁력을 약화시킨 원인이 되기도 했다.
예전의 병원 건축은 병원의 효율성을 기능적으로, 물리적으로 얼마나 잘 해결하느냐에 초점을 맞춰 발전해 왔지만 의료 서비스에 기대치가 점점 높아지면서 최근의 의료 소비자들을 만족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기 때문이다. 심리적 안정감이나 정신적 만족감을 주는 의료 서비스를 원하는 소비자의 니즈 변화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병원 건축은 생명에 대한 이해와 인간을 중요시하고 감성디자인을 공간의 혁신을 통해 끊임없이 추구하며 미래를 대비하고 변화하는 시스템에 대응하여 병원 본연의 기능을 다시 되돌아보며 더 나은 효율을 추구하며 인간의 삶을 변화시키고자 하고자 하는 결과가 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