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무상 연세의대 명예교수(전 가천대 석좌교수·전 의학교육평가원장)
이무상 연세의대 명예교수는 1970년 연세의대를 졸업하고, 1979년 연세대 대학원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비뇨기과에서 전공의 과정을 마치고 1977년 전문의 자격을 받았다.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비뇨기과장과 연세의대 비뇨기과학교실 주임교수를 지냈으며, 연세의대 의학교육학과장을 맡기도 했다.
의협 학술이사·(재)한국의학원 이사·대한의학회 수련이사·부회장·감사를 거쳐 한국의학교육평가원장(2007∼2010년) 등을 맡아 의학교육과 의대 인정평가의 틀을 구축하는 데 앞장섰다. 역대 정부의 의대 신증설 정책을 둘러싼 뒷 이야기를 3회에 걸쳐 게재한다.
당황한 의료계는 1996년 늦은 봄 의협 대의원 총회에서 '한국의학교육협의회'를 구성하여, 정부의 '의대 신·증설'에 대응하기로 결의했다. 그때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의대 신·증설'에 대하여 의협과 병협의 입장이 많이 달랐다.
한편, 1996년 '한국대학교육협의회'(대교협)는 31개 의과대학에 '의학과 평가'를 시행했다. 1996년 말 연세의대가 1등으로 발표되자 서울의대가 크게 반발했으며, 실제 문제가 많은 신설의대는 평가를 하지도 않았다. 사실 그때까지 의학교육계는 인정평가와 대교협의 학과평가가 어떻게 다른지 몰랐다. 서열을 메기는 '의학과 평가' 방식에 반발하는 분위기에서 의학교육에는 '인정평가' 방식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왔다. 그러나 의학과 평가를 이미 받았던 31개 대학은 "또 무슨 평가를 하느냐" 하면서 반대하여 '인정평가' 추진이 한마디로 난망이었다.
대한의학회 교육이사를 마치고, 1997년 4월부터는 의협의 교육담당 학술이사를 맡았다. 나에게 주어진 업무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의과대학 신증설을 막아라"는 지상명령이었다. 의협은 이미 1997년 초부터 가천의대 예비인가(1996년 11월)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여러가지 활동을 벌였다.
이근 이화의대 교수가 의학교육학회장이고 학술대회가 대전의 유성관광호텔에서 개최되었던 1997년 11월 어느 날로 기억된다. 그날 아침에 의협 회장과 기획이사는 문민정부의 실세인 청와대 P 수석(정책기획·사회복지)을 만나 전년도 가천의대 예비인가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본인가(신설인가)를 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P 수석은 지금도 20여개의 의대 신설 신청이 들어와 있다며 생각해 보겠다고 말했다. 필자는 유성으로 급히 내려가 사회를 보던 이근 교수에게 현 상황을 설명하고, 학장협 회의에서 발언기회를 얻어 소식을 전하였다. 그리고 이참에 '의과대학 인정평가사업'의 기능 및 효능, 그리고 시급성을 강조했다. 학장협은 "신설의대는 더 이상 없어야 하고, 모든 의과대학은 인정평가를 받아야 한다"는 결의를 하게 된다. 그리고 이 결의는 '의과대학 신·증설 저지'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래도 달포가 지난 1997년 12월 28일 가천의대 신설은 결국 인가됐다. 예년과 달리 한해의 마지막에 인가하였다는 것은 YS 정부도 그만큼 고민하였다는 흔적이다. 가천의대 인가 저지에는 실패했지만, 인정평가 사업이 자리를 잡는 계기가 됐다.
1997년 말 IMF 외환위기가 왔다. 어수선한 시기인 1998년 여름에 의협 학술이사 1명에 기획이사와 의협 사무총장 등 3명이 1팀으로 의협의 차로 신설의대 9개교에 미리 공문을 보내어 '비공식적 신설의대 실태 파악'에 나섰다. 2명의 의협 학술이사(김노경 서울의대 교수와 필자)는 진료 때문에 교대로 참가하였다. 필자는 강원·건양·서남·제주의대를 보았다. 하루 일정이라서 새벽 5시 의협에서 출발했지만, 시간 제약 때문에 자세히는 못보고 차 한 잔 얻어 마시고, 그냥 학교 한번 둘러보고, 홍보물과 자료를 얻어 오는 방식이었다.
서남의대는 "의과대학은 제 생명입니다"라고 말하는 이사장과 해부학교실을 은퇴한 초고령의 총장 겸 의대학장과 우선 인사를 했다. 당시 서남의대는 외형으로는 깨끗한 벽돌 신축 건물이었다. 그런데 2층부터는 중간에 복도가 없고, 모든 방과 방 사이에 벽이 없었다. 즉 건물 외벽만 있는 건물이었다. 도서관에는 의학서적보다는 삼국지와 무협소설이 많았고, 이사장이 특히 자랑하는 전자현미경은 굉음을 내고 있었지만 어디서 폐기 처분한 것을 갖다 놓은 것이 틀림없었다. 30분 동안 돌아보고 곧장 떠나는데 교수와 직원들이 의대 현관에서 대학정문까지 도열하여 박수치며 배웅을 받는 중에 이사장이 차에 탄 방문단에게 대형봉투를 주기에 창문을 급히 올려 거절하고 서둘러 되돌아 왔다. 신설의대에 대한 불신이 더 깊어만 갔다.
필자는 신설의대 방문 때마다 '수업 시간표'를 챙겼다. 의과대학 수업 시간표의 특징은 중고등 학생들 시간표처럼 강의와 실습이 연속해서 편성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런데 당시 신설의대 수업 시간표는 중간이 비어 있었다. (-)2교시, (-1)교시…9교시, 10교시. 이런 식이었다. 새벽 6시에 첫 강의를 시작했다가 6∼8시간 공강 후 오후 8시나 9시에 다시 강의가 시작된다는 뜻이다. 학생들에게 하루의 대부분인 공강 때에는 어디에 있냐고 물으니 하숙방·도서관·운동·당구장에서 시간을 보낸다고 했다. 기존 타 대학의 교수(주로 서울의 메이저의대 교수)들을 불러 수업을 하려니 이럴 수밖에 없는 사정인 것이다. 교수 입장에서도 서울에서 볼일을 보고 하루 일정으로 진행하려니 늦은 저녁이나 이른 아침에 수업을 진행하다보니 시간표가 이렇게 된 것이다. 이런 신설의대의 교육 현황을 전문지에 알리니, 일간지에서 전재를 하기도 했다.
이런 '못된 짓'(?)을 하다가, 의협은 정부가 관여하는 대교협의 학과평가가 아닌 '의학교육계의 자율적인 인정평가'로 신설의대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더 이상의 '의대 신·증설'은 막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의협 임원들에게 그간 열심히 설명한 덕이다. 그래서 의협 학술국의 사업이 됐다. 양은배 연세의대 교수(의학교육학과, 당시 조교)가 도움을 많이 줬다. 또 당시 맹광호 가톨릭의대 학장이 각 대학이 인정평가를 받도록 설득해 큰 도움을 받았다. 인정평가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잡무는 양은배 교수가 도맡았다. 당시 연세의대에서는 월급은 연세대에서 받고, 일은 의협 일만 한다고 필자를 많이 비난했다. 필자는 의협 집행부 입장에서 이에 필요한 재원을 지원했다. 당시에 연간 평균 1억 원 정도의 예산이 소요됐다.
의협은 의과대학 교수들의 희생적인 자원봉사로 이루어지는 '의학교육 인정평가사업'의 기능과 역할을 이해하게 되어, 결국 오늘날의 '한국의학교육평가원'이라는 재단법인의 기본 재원을 출연하게 된다. 당시에 의협의 가장 큰 현안이 '의과대학 신·증설 저지'였으니 당연한 결과라 하겠다. '의학교육 인정평가' 사업 초창기에 도와준 의대 교수들에게 지금도 진심으로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