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무상 명예교수 '의대 신·증설' 저지 옛 이야기(하·끝) 

이무상 명예교수 '의대 신·증설' 저지 옛 이야기(하·끝) 

  • 이무상 연세의대 명예교수 admin@doctorsnews.co.kr
  • 승인 2020.09.15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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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상 연세의대 명예교수(전 가천대 석좌교수·전 의학교육평가원장)

이무상 연세의대 명예교수는 1970년 연세의대를 졸업하고, 1979년 연세대 대학원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비뇨기과에서 전공의 과정을 마치고 1977년 전문의 자격을 받았다.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비뇨기과장과 연세의대 비뇨기과학교실 주임교수를 지냈으며, 연세의대 의학교육학과장을 맡기도 했다.
의협 학술이사·(재)한국의학원 이사·대한의학회 수련이사·부회장·감사를 거쳐 한국의학교육평가원장(2007∼2010년) 등을 맡아 의학교육과 의대 인정평가의 틀을 구축하는 데 앞장섰다. 역대 정부의 의대 신증설 정책을 둘러싼 뒷 이야기를 3회에 걸쳐 게재한다.

이무상 연세의대 명예교수(전 가천대 석좌교수·전 의학교육평가원장) ⓒ의협신문
이무상 연세의대 명예교수(전 가천대 석좌교수·전 의학교육평가원장) ⓒ의협신문

IMF사태를 겪은 DJ정부에서도 매년 의대 신설 신청이 20여 곳, 많을 때는 30곳이 넘었다. 극심한 경제위기 상황인 IMF인데도 정치권의 인가 움직임도 포착되었다. 단골 신청 기관은 사립으로는 동의대학·대진대학·국제대학 등의 대학 외에도 좀 규모가 큰 중견 종합병원 등이다. 그들은 "을지병원·길병원·차병원은 되고, 왜 우리는 안 되냐"는 식이었다. 그리고 국립은 목포대학·창원대학·강릉대학·삼척대학이 단골이었다. 사립대학의 정보는 극비지만, 국립대학 정보는 일부러 허술한 것 같았다. 당시 교육부 실무자들은 국립의대 신설을 아주 싫어했다. 아마 지금도 그럴 것이다. 사립의대 신설인가 후 재정문제는 교육부 공무원들과는 상관이 없지만, 국립의대는 그들의 일이라서 인가 후에 예산당국과의 설립 예산에 관한 '밀당'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앞으로 의과대학 설립은 준칙주의를 따른다"고 선언하고, 1998년 '의대설립준칙'에 관한 연구를 김일순 연세의대 교수에게 맡긴 것이다. 

국립의대 신설과 관련한 에피소드
1999년 후반, 교육부 공무원이 전화로 저녁 6시쯤 국립 목포대학과 국립 창원대학의 설립신청서와 관련 자료를 보내니, 급히 검토해 달라고 했다. 다음날 아침 7시에 청와대에서 인가여부에 대한 교육부 의견을 브리핑해야 하는데, 본인들은 의과대학에 관하여 아는 것이 없으니 그들 대학과 신청서의 문제점과 약점을 대학 당 3쪽 이내의 기술(청와대 보고 형식)로 간추려서 다음날 새벽 6시 전까지 메일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오죽하면 그리하겠는가. 그래서 당시 필자와 양은배 조교는 밤 12시가 넘도록 작업해서 보내 주었다. 아마도 지금의 보건복지부와 교육부 공무원들도 현 시국의 문제에 대한 속마음은 틀림없이 예전과 똑같을 것이다. 

각설하고, 의대 신설 외에 한편으로는 의약분업 문제가 1999년부터 본격적인 파동을 일으켰다. 문민정부는 1998년 2월 25일 물러나고 같은 날 고등교육법이 처음으로 시행됐다. 다음 정권인 DJ정권은 IMF위기 원인은 단순한 외환위기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모든 문제가 함축적으로 폭발하였다고 봤다. 그중에 하나가 고등교육문제에 있어서는 우리 사회의 극심한 대학입시 경쟁도 사회 부조리의 한 원인이라는 중론이 자연스레 형성된다. 그래서 그 냉각방법을 모색한다. 그래서 문민정부의 교육개혁위원회(교개위)처럼 '새교육공동체위원회(새교위)'를 구성하고, 특히 대입경쟁이 극심한 '법학'과 '의학'의 교육과정을 대학원 과정(전문대학원)으로 옮기면 그 열기를 식힐 수 있겠다고 논의된다. 교개위가 만든 고등교육법 제정 당시의 논의도 그러했기 때문에, 더구나 IMF 당시이기에 자연스러웠다. 그래서 새교위 산하에 법학과 의학교육전문위원회를 만들었다. 즉, 인기학문에 고졸생의 대입경쟁은 부모의 경쟁이라서 사회문제로 변질되지만, 대학생들의 대학원 입시경쟁은 성인 학생 자신들의 경쟁이라서 사회문제로의 전환이 크게 완화될 수도 있다는 희망이 작용한 것이다. 

그래서 법학은 C 서울대 법대(헌법학) 교수(당시 간사는 J 건국대 법대 교수, 후에 박근혜 정부 때 장관과 20대 국회의원을 역임)가 맡고, 의학은 필자가 맡았다. 또한 이미 인가한 의대를 취소할 수는 없지만, 대학원 체제로 전환하면 교육부 입장에서는 대학원이므로 학부와 달리 학사행정 관리에 신축성이 있다는 것이 큰 매력이라서 매우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1994년 8월 30일 열린 의과대학 신증설 저지 궐기대회. 궐기대회 참가자들이 결의문을 낭독하고 있다. ⓒ의협신문
1994년 8월 30일 열린 의과대학 신증설 저지 궐기대회. 궐기대회 참가자들이 결의문을 낭독하고 있다. ⓒ의협신문

그 참에 2000년 의약분업 의사 총파업이 터졌다. 한겨레 보도처럼 파업 의사를 달래기 위한 방편으로 입학정원 감축이 생긴 것이 아니다. YS정부 초기 3년 동안 9개교 신설에 400명이 늘어서, 이미 1997년 초 부터 3년간 온갖 수단을 써서 더 이상의 부실한 의대신설을 막기 위한 노력을 진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이 문제와는 상관이 없는 2000년 의사파업으로 생긴 '국무총리 직속 의료발전특별위원회(의발특위)'가 생기면서 자연스럽게 YS정부의 무리한 의과대학 신설 인가에 대한 뒷수습을 함께 다루게 된 것이다.결국 필자가 의발특위 의료인력전문위원회를 책임 맡게 됐다. 의료인력 전문위은 교육부 실무자와 밀고 당기다가 3,058명으로 정해진 것이다. 

처음에는 1994년 이후에 증원된 입학정원은 '의과대학 입학정원 설정은 교육부 장관과 보건복지부 장관의 합의에 따른다'는 '국무총리 지시각서 제34호(1981년 8월 6일)와 제1994-14호'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원천무효라고 주장했다. 

마침 한국은 미래에 의사과잉이 우려된다는 세계보건기구(WHO)의 건의를 바탕으로 일단은 10%를 우선 감축하고, 연차적으로 30%를 줄이자고 합의했다. 그리고 신설 인가된 학교를 이제 와서 취소할 수는 없지만, 현 시점에서 각 대학을 인정평가해서 전국 정원에서 최소한 '부당하게 늘어난 400명' 증원을 모두 줄이자는 주장이 설득력을 갖게 되었다. 이 400명은 또한 각 의과대학들이 여러 방법으로 더 선발하는 학생의 전국 총합이 대략 400명이었기 때문이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면 이렇다. 원래가 당시의 고등교육법 시행령 제29조 제3항과 제28조 제3항 제2호에 따르면 '모집단위를 옮기는 경우에는 그 입학정원의 범위를 초과할 수 없다'(복수 전공)고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교육부와 보건복지부는 이를 묵인해 왔고, 특히 소규모 의대는 이를 최대한 이용하였다. 그래서 의발특위의 교육부 공무원은 꾀를 내어서 '복수 전공', '학사편입학, '정원 외 입학'(재외국민입학, 농어촌 특별전형 등)을 의과대학에 적용하지 않으면 감축 효과가 대폭 증폭된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솔직히 말해서 당시의 모든 의과대학은 인가정원의 15∼20% 이상을 더 뽑고 있었다. 그 합이 대략 400명이다. 2002년 의협 조사에 의하면, 41개 의과대학에 3,260명 정원이지만, 그해의 입학생은 실제는 40개 대학에 3,634명(가천의대 미제출)이었고, 가천의대를 포함하면 실제 3,700여명으로 추산되었다. 입학정원을 대략 3,300명으로 보면 실제 인원은 항상 400명이 더 많은 것이다. 여기서 400명이 의사인력을 논할 때에는 항상 떠오르는 숫자가 된다.

또 이때에 대학에는 대학당국이 골치 아파하는 속칭 '영세학과(정원 20명인 학과)'가 있는데, 마찬가지로 교육부는 '영세의대'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며 물었다. 예를 들어서 대구가톨릭의과대학은 입학정원이 20명으로 1990년 10월 16일에 인가되어 다음해 3월에 개교하는데, 그 후에 계속 증원문제로 교육부를 압박해서 골치를 앓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의과대학의 정원은 다른 선진국을 보더라도 교육효과 때문에 최소 40명은 되어야 한다고 답했다. 감축 방안 논의 중에 지역 인구 대비로 줄이면 정치적 문제가 되어 더 골치가 아파서 '상후하박'을 적용하여 줄이자는 방안이 도출된다. 자연히 40명이 '최소선'이 된다.

결국 이렇게 저렇게 계산을 하다가 교육부에서 400명의 반인 218명만 줄였고, 결국 1994년 정원 때 보다 182명이 늘어나게 됐다. 의발특위 본회의에서 새로운 정원 계획의 적용 시점을 논의하다가 내년부터 적용하는 것은 고3 학부모들이 항의할 것이라 안 되었고, 다시 당시 고1 또는 중3부터 적용하자고 했다가 교육부가 중1을 고집했다. 회의가 길어지면서 피곤해서 슬그머니 6년 후인 2007년이 된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서남대의 부정·부실이 부각되었고, 특히 서남의대는 다른 40개 대학이 받고 있는 '의학교육 인정펑가'를 계속하여 거부했다. 

필자는 1998년 비공식적인 첫 방문 후에도 인정평가 때문에 공식적으로 두 차례 더 방문했다. 겉으로만 그럴듯해서 놀랐던 서남의대는 큰 변화가 없었다. 

결국 오랜 사회적 갈등 끝에 결국 2018년 초에 서남의대는 교육부의 폐교 명령을 받았다. 필자의 첫 방문 후 20년만이다. 

그러나 2017년 서남의대 의예과 신입생은 2023년에 졸업한다. 단 한 개의 부실 의과대학의 후유증은 아직 끝나지 않고, 이렇게 질긴 것이다. 바로 그 후유증은 먼 훗날까지 고스란히 국민의 몫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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