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성기준·차철환 교수를 추억하며
황건 인하의대 교수(인하대병원 성형외과)
우리에게 익숙한 관포지교(管鮑之交)라는 고사성어는 춘추시대 제나라의 재상을 지낸 관중(管仲)과 포숙(鮑叔)의 우정을 말하는 것으로서, 우정의 대명사로 쓰인다. 서로에 대해서 어느 누구보다도 더 잘 이해하고, 어려울 때 도와주며, 서로의 발전에 보탬이 되는 아름다운 우정을 일컫는다.
필자가 졸업한 대학의 스승들 중에 이와 같은 사례를 본 적이 있다. 한 분은 32년전에, 나머지 한 분은 며칠 전에 70년 간의 우정을 안고 타계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터졌을 때 기준과 철환은 의과대학 본과 2학년이었다.
학생들은 흩어져 피난길에 올랐고, 9.28 서울수복과 1951년 1.4 후퇴를 거쳐 부산에서 만났다. 1951년 여름 '대학교육에 대한 전시특별조치령'이 내려 그 해 8월 광복동 2가 가건물에서 전시연합대학이 문을 열었다.
학교 앞은 혼잡한 인파로 들끓었으며 각 도에서 모인 피난민들의 사투리로 시끄러웠다. 콩나물 교실은 각지에서 모여든 학우들로 가득 차 일부는 딱딱한 긴 의자에 앉아서, 일부는 서서 강의를 듣고 있었다.
기준은 의과대학 재학중 뇌막염을 앓느라 휴학해 급우들 보다 나이가 많았다. 올백머리에 검은 잠바를 입고 나즈막한 음성에 초롱초롱한 눈동자를 가진 그는 학생대표로 학우들의 어려운 일을 도와주고 있었다.
꿀꿀이 죽 신세를 면치 못하던 '범일동 피난생활'에서 기준은 철환의 시험공부를 도와주거나, 점심시간에 오징어다리를 나누어주며 요기하는 등 흐뭇한 우정을 나눴다.
그가 졸업반이었던 1952년, 당시 서울의대 학장인 병리학교실 이제구 교수가 성기준 학생을 불렀다.
"기초학교실에 남아 연구하는 졸업생이 없어 대학이 망하게 생겼네. 자네가 사람을 모아주게."
기준은 그와 가까웠던 김재남(해부)·임정규(약리)·차철환(예방) 등을 기초학교실로 끌어 모았다.
기준은 졸업반이었을 때부터 학생조교로서 부산해부학실습장을 맡았으며, 고른 필체와 섬세한 그림의 프린트교재로 해부학 교과서를 만들어 후배들에게 제공했다. 이 작업은 서울수복 후에도 계속됐으며, 모든 실습자료가 폐허화된 교실에서 조직학 실습자료를 철야작업으로 준비했다.
피난살이 중에도 낭만은 있었다. 피난 갈 때도 바이올린을 손에 들고 간 철환은 연합대학 음악회에서 당시 음악대학을 다니던 여동생 인자와 함께 연주했다. 철환의 바이올린과 인자의 비올라의 화음은 학우들의 가슴을 울렸고, 기준은 미모의 인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철환의 소개로 기준과 인자는 결혼했고, 그들은 해부학 시체실 옆의 단칸방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수복 후 기준과 철환은 모교의 교수가 됐다. 그 53년 졸업생(서울의대 7회졸업)들이 전쟁으로 폐허가 된 기초학교실을 재건했던 것이다.
그러나 강인한 의지로 몸을 아끼지 않고 일했던 기준은 갑상샘암으로 고생했으며, 88 서울올림픽이 열리던 해 강의 중에 뇌출혈로 쓰러져 이틀 후 유명을 달리했다. 그의 사후 국민훈장 모란장이 추서됐다.
중학교에 다니던 딸 하나와 남겨진 여동생 인자를 보고 철환은 가슴이 아팠다. 자신이 존경하던 친구에게 아끼던 여동생을 시집 보냈는데 끝까지 해로하지 못한 것이 안돼 보였기에 조카를 더욱 가까이 챙겼다. 기준 집안의 대소사에 나섰으며, 조카의 결혼식에 아버지처럼 데리고 들어갔다. 자신이 타계하기 직전까지 노구를 이끌고 기준의 기제사에 꼭 참석했다.
철환은 졸업 후 꼭 20년간 모교에서 교직생활을 하다가 고려대학으로 자리를 옮겨 환경의학연구소 설립에 산파역을 맡았으며 환경과 의학을 접목시킨 공로로 1982년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공해병·직업병의 전문가로서 환경문제 연구의 공로를 인정받아 1991년에는 각국 정부의 추천을 받아 산림보호·대기·수질·언론·발명 등 15개 환경관련분야에서 환경보전에 힘쓴 사람들에게 주는 명예로운 '글로벌 500'에 선정됐다.
그 차철환 교수가 지난 11월 10일 노환으로 타계했다. 마석 모란공원의 가족묘에 먼저 떠난 부인 장봉선 여사와 합장됐다. 두 딸을 남겼다.
필자는 석사지도교수였던 성기준 교수와의 인연으로 차철환 교수가 살던 평창동 자택에 몇 번 가 보았다. 집 전체가 부인이 가꾼 '아프리칸 바이올렛'으로 덮여 있었다. 차 교수와 장 여사는 성 교수의 타계 이후에 전문의를 취득한 필자가 대학에서 근무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줬다. 필자는 그 직장에 29년째 근무하고 있다.
길을 가다가 꽃집을 보거나 카페에 화단이 있으면 꽃들을 둘러본다. 보랏빛 꽃이 있으면 평창동의 그 '아프리칸 바이올렛'과 '기준과 철환의 우정(成車之交)'이 생각난다.